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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큰사전》, 28년의 대장정

한때 나라를 빼앗겨 한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국어학자들이 있었어. 
그들의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우리말 사전이야. 
첫 우리말 사전이 나오기까지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 
심지어 그 소중한 원고를 잃어버렸다가 서울역에서 되찾았다는데… 
서울역 역장이 쓴 그날의 일기를 함께 읽어보며 28년의 대장정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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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함

1945년 9월 8일, 경성역(서울역)

오늘도 화물 정리 작업이 계속됐다. 받는 이가 대부분 예전 조선총독부 관련기관이거나 일본인들이라 주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보낸 이가 함흥지방법원, 받는 이는 경성고등법원. 내용물이 꽤나 묵직하면서도 소리는 가벼운 게 종이류 같았다. 

이 역시 주인 잃은 화물이라 넘기려던 순간, 얼마 전 역 창고에 찾아온 어떤 손님들이 떠올랐다. 모두들 초췌한 얼굴이었는데, 찾는 물건이 특이해서 기억이 났다. 우리말 사전 원고라고 한다. ‘맞아, 그 부탁이 너무 간절했었지.’ 기억이 한층 선명해졌다. 3년 전 일본 경찰에 잡히면서 원고도 같이 빼앗겼다고 했다. 이들은 함흥에서 옥살이를 했지만, 경성에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어서 재판 증거물이 된 원고만 먼저 경성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을 맞아 석방되면서 원고가 있을 만한 곳은 전부 찾아보는 중이라고.        

“만약 원고 비슷한 걸 찾게 되면 반드시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학자 여러 명이 20년 가까이 만든 원고입니다.”
그들이 말한 원고 매수도 놀라웠다. 무려 2만 6500장이 넘는단다. 그 손님들은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을 가르쳤단 이유로 감옥에서 고생했던 것이다. 감옥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지. 그들이 찾는 것의 무게가 한층 무겁게 느껴졌다. 

동료들과 가슴을 졸이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모두가 그 손님들이 찾는 물건이 맞기를 바랐다. 글은 물론이고 수정 표시로 빼곡한 원고지를 보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가늘다
1. 몸피가 작다.
2. 선(線)의 넓이가 좋다.
3. 소리의 양(量)이 적다.

가늠 [명사]  
1. 목표(目標)에 맞고 아니 맞음을 헤아리는 표준.
2. 시세(時勢)의 기미(機微)를 엿보는 눈치.

보다[타동사] 
1. 목표에 맞고 아니 맞음을 헤아리어 보다.
2. 시세의 기미를 엿보다.

쇠[명사]
총의 견양(겨냥, 목표를 보고 겨누는 것)을 보기 위하여 총대 끝 위쪽에 뾰족하게 내민 쇠. (중략)

“역장님, 어서 그 손님들을 불러야죠.” 
“아, 맞다…. 연락처가 어디 있더라!”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원고를 찾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원고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내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역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피땀 어린 원고를 되찾은 그들은 눈물마저 글썽였다. 그들을 보며 나는 정말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았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났다.


민족의 혼을 담은 그릇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모국어를 갖고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이야. 지식이나 생각을 빠르고 명쾌하게 받아들이거나 표현할 수단을 가진 것이거든. 게다가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개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맞춤법은 어려워도 문자 자체를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아. 뭔가를 읽을 때는 물론이고, 컴퓨터 타자나 핸드폰의 문자패드를 칠 때면 한글의 편리함을 더욱 실감하게 돼. 

한글은 소리를 문자로 표현한 표음문자야. 뜻을 문자로 표현한 한자와 여러모로 비교되곤 하지. 그런데 소리 나는 그대로만 표기하면 오히려 단어 뜻을 파악하기 어려워지거나, 비슷한 발음이어도 뜻은 다른 단어들과 헷갈릴 수도 있어. 그래서 단어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표기법을 정해 놓는데, 이것을 맞춤법이라고 부르고 맞춤법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사전이야. 평소에 잘 쓰이지 않아서 낯선 단어는 물론, 자주 쓰이면서도 뜻이 여러 개인 단어를 정리해 놓기도 해.  

지구상에 특정 언어를 쓰는 수천 곳의 집단이 있지만, 그 언어를 사전으로 정리해 펴낸 곳은 생각보다 적어. 우리도 첫 사전이 나온 건 100년도 되지 않아. 사전은 고사하고 우리말의 규칙을 정리하고 해설한 책도 없었지. 우리말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도 널리 쓰였지만, ‘글’로서 한글이 널리 쓰이진 않았어. 공식 문서는 물론 지식을 전달하는 글 대부분이 한문으로 쓰였거든. 19세기 말에 우리말을 실은 사전이 나오긴 했지만,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 입장에서 해설해 놓은 것들이었어. 1880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낸 《한불자전》, 1890년대에 영국인들이 만든 《한영자전》 등이 바로 그거야. 

우리가 한글을 공식적으로 쓰게 된 건 1894년 갑오개혁[1] 때부터야. 당대의 지식인들이 한글 사용을 ‘개혁’으로 꼽았던 건 여러 이유가 있었어. 우선 같은 내용이라도 쉬운 한글로 쓰면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당시 정치, 경제,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중이었고, 이를 빠르게 배워야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고 다른 나라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또 하나, 한글 사용은 교육 목적을 넘어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던 민족주의 바람과도 큰 상관이 있었어. 과거 서양에서도 라틴어가 한문처럼 공식 문서나 지식 전달용 언어로 쓰였지만, 여러 민족들이 독립해 국가를 만들고 고유의 언어를 국어로 쓰게 되면서 각자의 언어 사용법을 정리하게 되었어. 고유 언어가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던 거지.

물론 그동안 한문체를 써 왔기 때문에 한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한동안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쓰기도 했어. 우리말 교육을 하려 해도 통일된 표기법이나 문법의 정리가 시급했지. 학자들은 우리말의 통일된 표기법을 정리한 책,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처음으로 사전을 만든 건, 근대 국어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긴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야. 그는 한글의 우수함에 자부심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많은 공부를 했는데도 이런 언어를 그동안 몰라준 것 같아 부끄러워했다고 해. 주시경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였기에, 한글을 단순 의사소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설명할 수 있는 징표로 보았어. 한 민족과 사회의 발전은 말과 글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 거지. 그래서 한글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마다 보성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어. 주시경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보성학교 근처의 한성사범학교 학생들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찾아왔어.    
무엇보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학생 시절에 〈독립신문[2]〉의 교열을 맡았던 적이 있어서, 누구보다도 한글 표기법과 문법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느꼈어. 그래서 주시경은 제자 몇 명과 함께 ‘말모이’를 만들기 시작했어. 말모이는 주시경이 1914년 세상을 떠난 뒤 집필진이 하나 둘 빠지며 결국 책으로 나오지 못했지.

하지만 주시경의 제자들은 사전 편찬과 우리말 연구, 교육의 의지를 이어나가게 돼. 이들은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해 1929년부터 우리말 사전을 펴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어.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전을 만들 때 필요한 기준을 의논했고, 2년 간 총 69회의 심의를 거쳐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지. 사전 편찬을 위해 모은 어휘 수는 무려 16만여 마디! 사전에 실릴 말에는 표준어 뿐 아니라 지역 사투리와 옛말도 있었고, 학생 5000여 명이 이를 수집했어. 그렇게 모인 원고 매수만 총 2만 6500여 장이었다고 해.      

멀고도 험했던 사전 만들기

당시 우리말을 없애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꽤 체계적이었어. 그중 하나가 입시 과목에서 조선말을 제외해 버린 거야. 입시에서 멀어진 과목은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지기 쉬우니까. 사람들 사이에 한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퍼졌고, 덕분에 우리말 사전을 펴내는 일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지. 필요한 돈이나 우리말 어휘 모음을 기증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어. 

하지만 식민지 지배 아래서 우리 언어를 지키는 일은 험난했어. 1930년대부터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로 침략 전쟁을 확대했고, 이 전쟁에 식민지 조선인들까지 강제로 동원했어. ‘일본인(내지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선의 각종 문화를 없애려 들었어. 언어 정책 역시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갔지. 1940년부터는 창씨개명 제도를 시행해 조선 사람들의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했고, 우리말로 된 신문도 폐간시켰어. 교육 현장은 물론 생활 곳곳에서 우리말을 쓸 수 없도록 했고, 많은 민족주의[3] 운동가들을 사상범으로 간주해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잡아 가둘 수 있는 법령을 만들었어.

일본 입장에선 우리말 보존 활동 자체가 민족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를 비롯해 많은 우리말 교육자들 역시 일본의 탄압을 받게 되었어. 그게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4]’이야. 결국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잡혀간 이들 중에는 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어. 그 과정에서 원고와 자료들 역시 빼앗겼지.

해방이 되고,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사전 원고부터 찾았어. 여러 곳을 수소문했지만 원고를 못 찾았고, 자칫하면 그 많은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지도 몰랐어. 그러다 기적적으로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아낸 거야!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다시 기존 원고를 검토했고, 그 과정에서 내용이 늘어나 당초 전 3권으로 계획한 사전을 전 6권으로 내기로 했어. 드디어 1947년 10월 9일 《우리말 큰사전》의 제 1권이 발간됐어. 처음에는 용지도 부족해 출판 자체를 걱정할 정도였지만, 제 1권이 나온 후 한글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 덕에 미국에서 인쇄물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해방 후에도 혼란한 사회상이 계속되었어. 국토는 물론 조선어학회 회원도 남북으로 나뉘었고, 남한에 남은 회원들은 학회 명칭을 ‘한글학회’로 바꾸었어. 

사진_우리말 큰사전 원고 일부

제4권이 나오려는 참에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전쟁 중에도 회원들은 나머지 원고 수정 작업을 멈추지 않았어. 그런데 전쟁만큼 사전 출판을 힘들게 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한글 파동’이었어. 1953년, 정부는 맞춤법이 어렵다며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걸로 맞춤법을 고치자고 했어. 기존의 맞춤법은 단어의 기본 형태를 살려 쓰는 형태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 때문에 꼴을 바꾸면 소리가 달라져도 대부분은 단어의 기본 형태를 살려 쓰고 있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글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하는 쪽이 사람들이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맞춤법이 바뀌면 앞으로 나올 사전은 물론 기존에 펴낸 사전도 그에 맞춰 새로 고쳐야 했고, 사전이 나오는 날짜도 더욱 늦어지겠지? 한글학회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반대했어. 그러자 정부는 새 맞춤법을 밀어붙이기 위해 미국에서 보내온 인쇄물품을 못 들어오게 막기도 했어. 이 한글 파동은 2년 정도 계속됐고, 그 사이 맞춤법 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결국 정부가 맞춤법 개정안을 포기하게 되었어. 하지만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걸 무조건 틀렸다고만 할 순 있을까? 지금 맞춤법은 여전히 형태주의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설겆이→설거지’처럼 몇몇 단어는 표음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7년 10월 9일, 제6권을 마지막으로 한글학회는 28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어. 3권까지는 《우리말 큰사전》, 4권부터는 《큰사전》이란 제목으로 나왔지. 《큰사전》은 국어사전은 물론, 당시에는 없던 전문 용어 사전이나 백과사전 역할까지 겸했던 사전이야. 

지금은 종이 형태를 넘어 인터넷으로도 사전 검색 기능을 기본으로 지원하다 보니 사전의 필요성을 실감 못 할 정도야. 워낙 각종 신조어가 나오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개중에는 사전에 없고 누리꾼들이 정리한 내용이 먼저 뜨기도 해. 사전의 존재 이유가 희미해지기도 하지. 출판사 입장에서도 사전은 잘 팔리는 책이 아니기에 별로 펴내고 싶은 책이 아니야.

하지만 기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특히 언어는 같은 말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몇 년 단위로도 바뀔 수 있잖아? 《큰사전》은 수백 년 전 우리말과 근대의 우리말 변화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중요한 자료야. 또한 뭔가를 정의하고 그것을 정리한 기초 자료는 그 내용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집단지성을 발전시키며 더욱 깊이 있는 자료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돼. 《큰사전》을 토대로 더욱 다양한 용도에, 뜻풀이와 예문 등이 보강된 사전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우리의 언어생활은 물론 지식과 문화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