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부산의 한 영어학원 원장이 <유레카>로 전화를 주었다. 친절하고 열정적인, 매력 있는 부산사투리의 원장은 ‘자신이 찾던 바로 그 책’이라며 고마움을 전해왔다. 상담 전화를 받던 담당자가 그 말을 전해주었을 때 논술이나 국어, 토론학원이 아닌 영어학원에서 왜?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통화하는 게 좋겠다는 담당자의 권유를 들으며 일단 마감을 마치고 전화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마감 후 통화를 했는데, 부산의 영어학원장은 학생들이 영어 독해 이전에 한글 독해가 안 돼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고, 우리는 몇 차례 통화를 하다가 부산의 학원 세 곳에서 텍스트 독해와 관련된 강연을 하기로 약속했다.
강연 내용에 대해 고민을 잠깐 했지만, 오랫동안 아이들이 보는 잡지를 만들면서 답답하게 생각한 문제 보따리를 학부모들 앞에서 풀어놓으리라 마음먹었다. 세상은 빠르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바뀌고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어른들의 속도는 거북이보다 느린 것 같았다. 학교도 학부모도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고, 과거의 방식에 매여 있었으며, 무엇보다 입시라는 성과에 목매달고 있었다. 학부모와 아이들은 명문대 진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미 명문대 진학은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다시피 요즘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높아서 공부하는 내용이 꽤 수준이 높다. 특히 상위권 그룹의 아이들의 경우 읽고 독해해야 할 텍스트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단락의 내용을 독해해야 한다.
우선 어려운 결정은 보통 단순한 결정보다 더 많은 변수를 갖고 있다. 더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질 때 그만큼 결정을 내리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 사람들은 어떤 상태에서 더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한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의식적인 상태 있을 때보다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어려운 결정을 더 잘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결정을 내리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느 특정 변수에 집중하면서 다른 여러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_<의사결정에서의 변수>
사실 비문학 독해 지문들에 비하면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을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생들이 읽어야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어휘와 문장구조, 다루고 있는 내용 모두 버거울 수밖에 없다. 이 토플 교재의 목차를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중세유럽 소작농의 삶’ 같은 인문 분야부터 ‘바이오 연료’ ‘해마와 공간기억’ ‘자연선택’ 같은 과학 분야, ‘다다이즘’ 같은 예술 분야까지 망라하고 있다. 텍스트의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려니와 꽤 어려워보였다.
초등학생 고학년이나 중학생들의 암기력은 사실 어른보다 뛰어나다. 이 아이들이 영어 단어를 습득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영어 단어를 알고 있어도 이 단어를 나열해 독해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 능력 이전에 텍스트 이해력, 즉 문해력이 필요하다. 단어도 알고 문법도 알지만 독해 혹은 문장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문해력, 텍스트 이해력, 한글 읽기가 부족해서이다. (물론 주제나 문장 자체가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생에게 버거울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영국에서는 이 나이에 셰익스피어를 읽고 토론한다. 읽기 훈련을 제대로 해나가면 결코 과한 문장이 아니다.)
나는 아이들의 교재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심각한 부조화가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학원장의 한숨이 컸는지도. 영어를 가르치기 이전에 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