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개라 부르고, 고양이를 고양이로 부르고, 꽃을 꽃이라고 부른다. 말은 인간이 가리키는 사물이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꽃이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꽃은 현실에서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개나리는 말은 현실의 개나리를 지칭하고, 진달래는 현실의 진달래를 지칭한다. 그런데 개나리 보고도 꽃이라고 하고, 진달래 보고도 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꽃이라는 말은 ‘개나리도, 진달래도 지칭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세상에 ‘때에 따라서 개나리도 되고 진달래도 되는 것’은 없다. 꽃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꽃이라는 말은 대항하는 사물이 없는데도 우리는 꽃을 하나의 물체를 가리키는 말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사용한다.
또한 말 중에는 상상의 세계에만 있는 것도 많다. 몸통은 말과 비슷하고, 머리는 사슴이나 염소를 닮은 전설의 동물 유니콘은 뿔에 영험한 능력이 샘솟아 힘이 세고 민첩해서 누구도 붙잡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유니콘을 순수함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쓴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천상에서 내려온 유니콘’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유니콘이 실제로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 말을 사용한다. 자유, 용기, 민주주의 같은 말들 역시 유니콘처럼 지칭하는 대상이 없는 추상적인 말들이다.
꽃이라는 말은 있지만 꽃이 없다는 것. 이 언어의 한계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현실에 꽃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사물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꽃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어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깊이 살펴보면 이 한계 때문에 크고 작은 일이 벌어진다.
헝가리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난제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문제를 해명하는 데 기존 철학자들이 애를 먹은 이유는, 어려운 문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답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