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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진경산수화를 시작하고, 완성하다

‘우리 땅의 실제 경치를 그린 산수화’란 뜻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조선 초까지만 해도 중국 산수화의 화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우리의 산수화는 진경산수화의 등장을 시작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를 개발하고 선두에서 이끌었던 이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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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문인의 ‘머스트 잇’ 아이템, 진경산수화

조선시대 산수화, 라고 하면 겸재 정선(1676~1759이 떠오를 정도로 대표적인 조선의 화가다. 정선의 산수화는 주로 양반 및 왕족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들이었다.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놀이는 산천을 유람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 발로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하인들이 짊어진 가마 위에 앉아 편안히 경치를 유람했다. 길 안내는 스님들이 맡고, 필요한 물건은 지역의 원님들이 지원해 주었으니, 엄청난 시간과 경비, 인력이 필요한 초호화 놀이였다. 물론 율곡 이이나 송강 정철처럼 직접 산에 오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자연에 대해 문인들은, 안빈낙도[1]의 이상향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풍경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겼으며, 탐미의 대상이었다. 가마 위에 여유롭게 앉아서 감상하는 자연이었으니 더더욱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당시 명망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이자 시문에 뛰어났던 김창협·김창흡 형제를 중심으로, 이들 문하의 선비들은 경쟁하듯 절경[2]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다녀온 뒤에는 반드시 그 감상을 긴 시로 지어 서로 돌려 읽었다. 하지만 글로 읽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는 일. 가마꾼, 안내인 말고도 그들이 반드시 동행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화가였다. 이들은 산천을 유람한 감동을 길이길이 남기기 위해, 화가에게 산수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달라고 주문했다. 마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듯.

이 시기에 산수화를 그린 화가들이 많았지만, 정선의 그림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 정선이 사양하는 법 없이 그림 주문을 받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무엇보다도 기법나 구도 면에서 단연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처음부터 정선만의 화풍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다른 작품을 모방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법이다. 정선 역시 중국의 최신 산수화 기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정선, <금강전도>

새록새록 여행의 추억도 담고, 못 가본 이들에겐 대리만족을... 

금강산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명산으로 꼽힌다. 사시사철 색다른 절경을 펼쳐보여 계절마다 별칭이 있을 정도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린다. 정선은 금강산을 여러 차례 올랐고, 그때마다 그림으로 남겼다. 정선의 금강산 작품 중에서는 59세 때 그린 <금강전도>가 가장 유명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원한 구도에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필법, 바위의 검은 먹빛과 하늘과 산의 경계에 은은하게 깔린 푸른 빛깔의 조화가 상당히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재밌는 건 바위마다 개성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정선은 언제부터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그가 금강산에 처음 오른 시기는 36세 때로, 이때 그린 금강산 작품집이 《신묘년 풍악도첩》이다. <금강전도>와 이 《신묘년 풍악도첩》의 <금강내산총도>를 비교해 보자. <금강내산총도>는 초기작이라 <금강전도>와는 섬세함의 정도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만, 극적인 구도와 색감, 필압[3] 등에서 대가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그림 모두 맨 아래 작은 구름다리를 시작으로 유람길을 그려놓았고, 각 봉우리마다 이름을 적어두었는데, 꼭 관광 안내도를 보는 듯하다. 맞다, 이 그림은 안내도다. 금강산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은 사람들, 혹은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그림이었다. 안방에서도 금강산을 바라보는 듯한 현장감이 살아 있다.

정선의 금강산 작품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소개돼 인기를 끌었다. 특히 산수화의 본고장이었던 중국에서도 그의 화법이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인정받았다. 산수화풍을 수입하던 나라가 산수화풍을 역수출하게 된 셈이다.

사진_전성, 《신묘년 풍악도첩》의 <금강내산총도>

'나는 화가다~'

개화기 이전 우리나라 화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정선 역시 밝혀지지 않은 개인사가 많다. 확실한 것은, 엄연히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는 점이다. 도화서[4]라는 설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와 연이 닿아 있었다. 또한 그의 선친은 벼슬이 없었지만 정선 은 정2품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화원의 경우 가장 높이 올라가봐야 정6품이다.

어엿한 양반 신분인데도, 정선 자신은 그 당시 다른 문인화가들과 달리 예술적 열정과 화가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우리 역사에서 문인화가는 많지만, 그들의 작품 활동은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예술 활동이 아닌, 그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취미 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독특한 초상화 기법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도 화가로 불리는 걸 꺼려했다. 그림이라는 ‘잡다한 재주’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상이 깎일 것을 두려워했던 탓이다. 하지만 정선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누구의 그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겸재 스타일’의 화풍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정선 (鄭敾, 1676~1759)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문인 신분이지만 집안이 가난했으며, 스승이었던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말년에는 정 2품 자리에 올랐다. 주로 산수를 즐겨 그렸으며, 금강산, 단양 등의 절경은 물론 자택 주변이었던 인왕산, 등의 경치도 그렸다.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예술흐름을 개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