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고려는 최초의 통일 국가이자,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도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코리아’의 원형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고려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갈수록 조선과 비교할 때 친근하게 와닿지 않는 점이 있다. 1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까마득한 탓이기도 하지만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나 서경(평양)이 북한 땅에 있기 때문에 휴전선에 가로막혀 찾아가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도 고려사를 멀게 느껴지게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다.
고려 왕조의 특징은 엄연히 하나의 통일된 왕조를 두었지만 왕권이 별로 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자칫 조선 시대에 비해 후진적인 정치였을 거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이는 조선 사회와 고려 사회의 구조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던 사회상에 걸맞게, 정치 권력층 역시 다수의 정치 세력이 공존하는 구조였으며, 왕실은 그 정치 세력 중 하나였다. 다수의 정치세력이 권력층을 형성하며 공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피바람을 동반한 세력 다툼이 횡행할 소지가 큰데, 고려 사회는 어떻게 공존의 구조를 만들었을까? 바로 정치세력들 간의 혼인이었다. 오늘날 정치가 혹은 정·재계 인사가 사돈을 맺는 것도, 지지 기반을 넓히면서 동시에 든든한 우군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고려 초 정치권력의 핵심은 단연 ‘지방 호족’이었다. 신라 후기에는 권력층 간의 다툼으로 진골귀족의 분열이 심해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방이 거의 사분오열 상태였다. 이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있던 지방 토호 세력들이 모여 만든 나라가 여럿 있었고, 그 중 최종 승자가 고려였다. 왕건 역시 개경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이었고,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 역시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은 29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유명한데, 대부분이 정략결혼이었다. 정략결혼은 고려 건국 직후 후삼국 통일 전쟁 전후에 주로 이루어졌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회유책 중 하나였던 것이다.
왕건과 사돈이 된 호족들은 시기와 종류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① 경제 기반 : 후삼국 통일 전 지방 부유층.
② 군사력 기반 : 후삼국 통합 과정에서 무장 세력.
③ 신라 왕족 : 후삼국 통일 후 신라 왕실.
이 중에서 신라 왕족과의 혼인은 ‘신라 계승’을 내세워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건의 부인들이 낳은 자녀는 34명 정도로, 부인 한 명에게서 자식 한 명을 본 셈이다.
사진_신라 말 호족 세력 분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