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 근교의 야외 무도회장이야. ‘물랭’은 풍차라는 뜻인데, 한때 파리 인근에는 30개가량의 풍차가 있었다고 해. 여기서 밀을 빻아 도시에 공급했지.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며 풍차는 하나둘 사라져갔어. 남은 곳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고. ‘물랭 드 라 갈레트’ 역시 원래는 제분소 풍차였지만 야외 무도회장으로 변신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핫한 명소였다고 해. 19세기 파리 시민들은 일요일 오후만 되면 이곳을 찾아 먹고 마시며 춤추고, 새로이 연인을 만나 사랑을 시작했지. 그림 속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서로 어울리는데 참 행복해 보여. 쾌청한 날씨 아래 다들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생의 기쁨을 누리고….

그림 속 나무 사이를 통과해 들어오는 햇빛은 쾌활한 분위기를 증폭시켜. 마치 해님에게 손가락이 있어서, 따스한 노란색이 감도는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모자와 옷, 뺨을 톡톡 건드리는 듯 하달까? 짙은 보랏빛 그림자도 빛이랑 절묘하게 뒤섞여 참 인상적이야. 르누아르는 인물과 사물의 윤곽선 또한 눈부신 햇빛을 머금어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게끔 일부러 뭉개듯이 그렸어. 빛의 흐름에 민감한 인상파들은 이런 그림 속 표현을 두고 찬사를 건넸지. 그러나 어디에나 호불호는 있는 법. 작품의 대담한 음영 대비 효과를 거슬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당시 한 평론가는 빛과 어둠이 반복해 자리하는 그림 속 무도회장 바닥을 보고 “바닥에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몰려왔다”며 불쾌함을 드러내기도 했다네.
화가는 무도회장의 흥취를 작품에 생생히 살리려고 물랭 드 라 갈레트 근처에 있는 집을 화실로 빌렸어. 그리고 장장 1년 반 동안 이곳을 드나들면서 작품에 매진했다고 해. 거의 매일 거대한 캔버스를 친구들과 낑낑대며 무도회장으로 옮겨 가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야.
그림 속 웃음 뒤, 씁쓸한 전쟁의 기억
‘물랭 드 라 갈레트’ 속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웃음은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그림이 그려진 1876년은 프랑스가 프로이센(통일 이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게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막대한 보상금을 물어야 했다.
뒤이어 전쟁 후 불공평한 배상 조약에 불만을 품은 군대 일부와 파리 시민들이 연합해 파리 코뮌[1]이 일어났다. 파리 코뮌 사령부가 바로 물랭 드 라 갈레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그 시절 르누아르는 첩자로 오인받아 파리 코뮌 군대에게 총살당할 뻔했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이 장소에서 벌어졌던, 혼란했던 사건의 기억을 몰아내기 위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당대 파리 시민들 역시 나라가 불안정한 가운데 씁쓸한 기억을 잊기 위해 무도회 같은 즐거운 일에 몰두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