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물리치고 관중 땅에 한漢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한나라는 여전히 북쪽의 흉노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유방은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적 정벌을 감행하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흉노의 계략에 말려들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했다. 이에 유방은 어쩔 수 없이 흉노와 화친 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 내용은 사실상 흉노에게 황실의 공주를 시집보내고,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치는 매우 굴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군사력으로 흉노를 제압할 방법이 없었던 한나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굴욕의 결과는 달콤했다. 그렇게 얻은 평화 속에서 한나라는 차근차근 국력을 키웠고,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다시 흉노와 맞서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흉노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는데….
흉노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칠 세력을 찾고 있었던 무제는 흉노와 원수지간인 월지月氏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했다. 월지는 만리장성 서북쪽에서 흉노와 세력을 다투던 유목민족이었는데, 흉노에 패해 서쪽, 즉 서역[1]으로 이동하여 대월지大月氏를 세웠다. 그런데 월지를 찾아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당시 유일하게 알려진 경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 즉 지금의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지역은 흉노의 세력권에 속해 있었다.
이 위험한 임무를 맡아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장건張騫이었다. 장건은 10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서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장건은 얼마 가지 못해서 흉노 기병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가 한나라의 사신임을 알게 된 흉노는 장건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아 흉노 여인과 결혼시켰다. 장건은 10년 동안 흉노 진영에 붙잡혀 있다가 기회를 틈타 탈출에 성공, 결국 대월지의 왕을 만난다.
그러나 카스피해 동쪽의 비옥한 땅을 얻어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월을 보내던 대월지의 왕은 다시 흉노와의 악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장건은 한나라로 돌아오지만 귀국길에 다시 흉노에게 붙잡혔다가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기원전 126년, 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장건은 흉노인 아내와 함께 한무제에게 돌아왔다.
비록 월지와 동맹을 맺는 사신으로서의 임무는 완수하지 못했지만, 장건이 13년 동안 서역을 돌며 보고 들은 정보는 한나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까지 서역은 중국인에게 미지의 세계였는데, 포도, 와인, 복숭아, 석류 등 이전까지 한 번도 중국에 들어온 적 없던 서역의 다양한 산물에 대한 정보를 장건이 가져온 것이다.
그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건 장건이 월지를 찾아가는 길에 거친 대완국大宛國[2]에서 생산되는 명마에 대한 정보였다.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고 전해오는 이 말은 한혈마汗血馬라 불렸는데, 달릴 때 핏빛 땀을 흘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제는 이 말을 확보하기 위해 대완국으로 사신을 파견했지만, 대완국은 한나라에 말을 공급해 달라는 사신의 요청을 거절하고 목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는 기원전 104년과 102년, 두 차례에 거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대완국을 공격했다. 원정을 이끈 장군 이광리李廣利는 결국 대완국을 함락시키고 3000필의 명마를 노획하여 한무제에게 바쳤으며, 서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말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였다. 이 원정을 통해 한나라는 한혈마를 얻게 됐을 뿐 아니라,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를 복속시켜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함으로써 서역과의 안정적인 교통과 무역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의 기병 중심 전투에서, 강인한 말은 지금으로 치면 탱크나 전투기에 버금갈만한 전략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무제는 이광리가 대완국을 함락시키고 명마를 몰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라는 노래를 지어, 이제 주변 유목민족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이 때문에 이 말은 한혈마라는 이름 외에 천마, 천리마 등으로 불리며 일종의 전설적인 존재로 중국문화 속에 남게 된다. 《삼국지》의 주인공 여포와 관우의 그 유명한 적토마赤馬도 한혈마 계열의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설 속에서 여포의 적토마는 성벽을 뛰어넘고 바람처럼 강 위를 달려 건너며, 큰 짐을 지고도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인이 이 말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유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중국 서북부 감숙성甘肅省에서 1960년대 말 오래된 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다. 동한東漢 때 어느 장군 부부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나왔다. 
날아가는 제비 등을 밟고 달리는 말이라는 뜻의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 혹은 동분마銅奔馬’로 불리는 이 유물은 높이 34.5cm, 길이 45cm 정도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말이 제비를 밟고 달린다는 것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달린다는 의미이니 그 기대와 상상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말에 대한 중국인의 기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 하나 더 있다. 흉노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던 장군 곽거병瓮去病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석상, ‘마답흉노馬踏匈奴’는 한혈마가 흉노족을 밟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한혈마 이전에도 잘 달리고 힘센 말은 있었다. 그러나 한혈마의 능력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한혈마의 도입은 마치 고속열차가 열차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것과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제 이후 이 새로운 품종의 말은 효과적인 기병 전술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혈마는 한나라 이후 중화제국의 군사력과 행동반경을 확장시키는 데도 적잖이 기여했다.
물론 말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무제 이후 흉노는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고, 내부 세력 분열로 인해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결국 기원후 89년, 한과 흉노 사이의 200년에 걸친 전쟁은 한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