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구세계의 모든 열강들은 이주라는 유령에 반대해 무자비한 조치를 취하는 데 합심했으나, 그러한 이동을 막을 수 없었다._ 오경석,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한울)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냉전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 간의 문턱을 자유로이 넘나들게 되었고, 세계는 정치적, 지리적 지형의 대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세계화의 파고가 높아 전 세계가 이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의 다른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표출되는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인종이나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한 충돌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기존 주민들이 이민자와 난민에게 일자리와 복지 등을 강탈당하고 있다고 반발하는 통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동유럽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벨기에 등에서는 오랜 역사 동안 이어져온 해묵은 민족적, 인종적 갈등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몇 해 전부터 ‘다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확산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문화 사회를 실감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2020년 경에는 우리 나라 전체 인구 중 5% 이상이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 사회가 될 것이며, 초등학생 4명 중 1명은 다문화 가정 자녀가 될 것”(천재교육, 사회교과서)으로 예측된다니, 단일민족이 우리 고유의 특수성인 양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경우 비교적 단일한 문화 전통 아래 살아온 데다 순혈주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서 다문화 사회로 인한 사회 갈등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감정적으로 배타성을 보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왜 세계는 ‘이주라는 유령’을 막을 수 없었던 걸까요? 굉장히 현실적인 경제문제와 연관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경우를 볼까요? 국내 전체 인구에서 이주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1% 증가했을 때, 국내총생산이 1.25%에서 1.5%까지 상승했다(스토커, 2004)는 조사가 있는데요, 이는 이주의 문제가 경제 문제와 현실적으로 얼마나 밀착돼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이고, 이주의 불가피성, 혹은 보편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 나라의 이주민 수용도 맥락이 다르지 않습니다. 보통 3DDirty, Difficulty, Dangerous라고 불리는 업종이 있는데요,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겪으면서 국내 노동자들이 이 업종을 기피하게 됐고, 대체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외국인 노동력의 유입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1994년 95,778명에 불과했던 국내거주 외국인은 2009년 5월 1일 현재 110만 6884명으로 주민등록인구 4959만 명의 2.2% 수준이고, 2008년에 비해 21만 5543명24.2% 증가하였다. 이러한 증가 추세라면 2050년 국내 외국인주민의 비율은 약 9.2%에 이르게 된다. 통상 이민사회로 분류되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이민자 비율이 10%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이민사회로의 진입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_ 이용재,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의>
하지만 불행히도 전 세계는 이주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충돌을 막을 해법을 못 찾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문화 사회로 인한 사회 갈등의 해법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다문화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다문화주의란 무엇이고, 다문화주의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며, 과연 다문화주의가 인종적, 민족적 갈등과 충돌을 넘어 공존의 해법이 될 수 있을지 살펴볼까요?
다문화주의를 쉽게 설명하자면, 한 국가 안에 여러 민족, 인종, 국가의 문화가 공존하는 형태를 말하는데요, 프랑스에서 발간하는 프랑스어 사전인 <프티 로베르>에서는 다문화주의를 간단히 “한 나라 안에 몇 가지 문화가 공존하는 것”으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는 간략하게 정의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문화주의'라는 용어는 1970년대 캐나다가 공식적으로 다문화주의 정책을 표방하면서부터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는 본래 원주민 부족과 프랑스, 영국 두 유럽국가의 국민들이 유입되면서 탄생한 나라였고, 그 이후에도 아시아, 아랍 등 세계 전역에서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캐나다는 현재 200여 개 민족 집단이 어울려 살고 있고, 40여개 문화가 캐나다 언론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그야말로 이민자들의 나라인 셈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 문화 등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1971년 당시 캐나다 연방수상인 피에르 트뤼도Pierre Trudeau가 캐나다를 통합할 새로운 이념으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선언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문화주의는 이렇게 어떤 체계를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요구에서 출발해 이론으로 정립된 것이라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분야나 학파에 따라, 또한 각 나라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간단히 정의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문화주의는 다인종 또는 다민족국가를 형성해온 북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 국가들이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그리고 다문화의 사회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사회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캐나다 다문화주의의 핵심은 다양한 형태의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즉, 다른 문화권의 이민자들이 가진 기존 언어, 식습관, 교육방식, 종교적 방식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호해주는 정책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 이슬람 문화권 사람이 유입돼 살고 있다면, 이들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보호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권리와 복지 혜택 역시 공평하게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는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북미와 남미, 유럽,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정책으로 채택됩니다. 이 국가들은 당시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 한시적으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는데, 이 이민자들이 자신의 나라로 귀환하지 않고 정착하게 되면서 이들을 사회 안으로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문화주의는 정책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입니다. 즉,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의 여성문화, 서구사회에서의 비서구적 문화, 성적 소수자 등 지배적인 문화에 밀려 뒷전에 있던 소수 문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입장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다문화주의는, 흑인, 여성, 토착민,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 남성 및 여성 동성애자 등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소수 집단이 사회적 냉대와 소외 등의 차별을 받지 않고 사회에 통합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는 이런 여러 소수 집단의 요구를 우산처럼 모두 포괄하려는 개념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인 동화주의에 대한 대안적 성격이 짙습니다. 이전까지 이민국가인 미국은 국가 통합 정책으로 동화주의를 채택했습니다. 동화주의는 소수 집단의 문화를 주류 문화 속으로 일방적으로 흡수시키는 것으로, 말 그대로 소수가 지배적인 다수의 문화 속으로 완벽하게 ‘동화’되는 정책을 말합니다. 동화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브라질인데요, 일본계, 원주민, 흑인, 유럽계 등 인종과 상관없이 ‘삼바’, ‘축구’ 등 브라질 문화 속으로 동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은 다혈통, 다인종 국가이긴 하지만 다문화국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다문화 정책 역시 다양한 민족과 인종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고 공존하려는 노력보다는, 일방적인 권위로 이주민들을 강제로 통합하려는 태도가 더 많았습니다. 다문화 행사를 보면 거의 외국 며느리에게 한국의 풍속을 가르친다거나, 우리 언어를 가르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행사는 드뭅니다. 또한 이주민과 자국민 사이에 태어난 2세들에 대한 교육이나 복지 혜택도 마련돼 있지 않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착취도 위험한 상태에 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주민에게 우리나라 국민의 권리를 주는 대가로 이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주류 문화를 인정하는 동시에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함께 살려낼 수 있는 다문화주의가 만능키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다문화주의가 오늘날 다문화 국가의 첨예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다문화 국가들이 반목과 질시를 넘어 폭력적인 테러 사태에 이르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다문화주의는 인권을 중시하며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의 문화가 제공하는 사회적 연대감이나 결속력을 해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인도 잠복해 있습니다. 즉, 다양성을 강조할 경우 하나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해칠 소지가 다분한데, 확고한 복지국가를 위해서는 이러한 민족적 연대감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문화주의는 이주자 사회를 게토화[1]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영국의 경우 90% 이상이 백인 영국인인데, 어떤 지역의 경우 이주자들과 자손의 비율이 50%를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문화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게토화를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더구나 최근 글로벌 위기가 대두되면서 다문화주의의 문제점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주민들과 자국의 저소득층 간의 취업 경쟁이 심각한 양상을 띠는가 하면, 복지혜택을 둘러싼 갈등도 심화되고 있고, 결국엔 이민자에 대한 테러 사태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극렬한 인종 분규가 빈번해진 상황이지요. 이에 최근 캐나다와 호주는 다문화주의 철회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가 하면, 미국과 서유럽은 ‘이민법’과 ‘국적법’을 강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다문화주의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련의 실패 선언은 유럽 국가에서 점차 늘어나는 극우파나 보수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이유가 강하다는 지적입니다. 현재 유럽 사회에서는, 다문화주의를 개선, 유지하는 것이 사회 통합과 인권 신장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인지, 아니면 다문화주의 정책을 폐기해야 사회 통합에 이를 수 있을지 첨예하게 논란이 일고 있어요.
그럼에도 ‘소수 문화와의 공존’이라는 다문화주의의 가치에는 주목해야 합니다.
다문화주의의 개념적 확장은 소수문화와의 공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종, 언어와 같은 드러난 소수성이 아니라 소수성 그 자체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고 소수성의 문제는 배제와 포섭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차이는 지속적으로 생성되며, 소수성의 문제로 드러난다. 따라서 다문화주의가 소수문화와의 공존으로 개념적 확장을 한다면 차이는 동일성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것은 드러난 차이가 아니라 잠재된 차이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이방인이지만, 그 누구도 이방인으로 남지는 않는다._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의>
다문화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갈등이 우리 사회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초등생 네 명 중 한 명이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된다니, 다문화주의를 정책적으로 어떻게 펼쳐나가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2006년 다문화주의 정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후,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정책과 제도를 도입, 추진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은 잡았지만, 전통적인 동화주의 정책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다문화주의 정책을 취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주의 유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현실적이고도,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의 불가피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차이를 넘어선 공존의 방법은 못 찾고 있는 형국입니다. 소수 문화와의 공존을 튼튼히 하여 다양성이 한 사회의 활력으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이상주의적인 걸까요? 다문화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일 겁니다. 다르지만 평등하게 살아갈 공존의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전지구적인 숙제입니다.
“각 개인은 나와 다른 사람들―엄밀한 의미에서 나 아닌 자는 결국 모두가 나와 다르다―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이것은 곧 자기의 권리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그와 동시에 타인 혹은 다른 집단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세기 전 볼테르가 관용을 외친 이후에도, 세계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나로 만들려는 인력들이 충돌하는 투쟁의 자리가 되고 있다. 자기를 지키며 타인에게 문을 열기, 즉 ‘열린 공동체’의 정신만이 다르게, 평등하게 살기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_ 마르코 마르티니엘로, 《현대사회와 다문화주의》(한울) 역자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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