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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들려주는 한국현대사

누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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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 바다야.
학교에 갈 때에는 그렇게 깨워도 꿈쩍을 않던 너희가 새벽 댓바람부터 스스로 일어나서 분주하게 준비를 하다니. 어찌나 신이 났는지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콧노래까지 부르던걸? 그래, 오늘은 3학년 전체가 역사박물관엘 간다지? 좋겠다. 역사박물관이 되었든 놀이공원이 되었든 수업을 안 한다니 얼마나 좋겠니. 그것도 친구들이랑 함께 서울나들이라니. 

그런데 들뜬 너희와는 달리 엄마랑 아빠는 며칠 전부터 걱정이 많았단다. 학교에서 단체로 차를 타고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끼리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그곳에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지. 그 복잡한 곳에서 길을 잃지나 않을까, 사고는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란 걸 거야.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생각이 나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던 아들 안중근에게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야.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쉽게 머리를 떠나지 않아. 겨우 한나절 동안 아들을 서울에 보내면서도 마음을 졸이는 엄마 아빠로서는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 대목이지. 말이 나왔으니까 오늘은 안중근 의사 얘기를 한 번 해보자. 엊그제 너희가 읽은 신문기사에도 등장한 인물이니까 말이야. 찬찬히 생각해보자. 

돌아가신 지 100년이 넘는 안중근 의사가 최근에 왜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랐지? 그래, 맞았어. 중국이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겠다고 하고,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하자, 일본이 발끈하고 나서면서부터야. 일본의 정부대변인쯤 되는 관방 장관이 “안중근은 일본에서는 범죄자”라며 “한일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어. 그 다음날에는 차관쯤 되는 관방 부장관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이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신문에 실렸던 거지. 한마디로 범죄자요 살인자의 기념물을 세우는 게 말이 되냐는 항의인 셈이야.

우리나라와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 우리나라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이 당시 주변국에 어떤 일을 했는지 돌이켜 본다면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으로 이런 분에 대해 일본이 범죄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는 발표를 했어. 중국 외교부도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저명한 항일 의사”라며 “외국인 기념시설 규정에 따라 안중근 의사 기념물 설치 관련 작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지.

아, 그런데 하얼빈 역은 왜 나왔을까?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바로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의 주역이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통감부의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죽인 곳이지. 바로 그곳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두고 지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외교적인 다툼을 하고 있는 거란다.

하늘이랑 바다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몇 해 쯤 전 일인데, 아마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지 100년째 되는 2010년이었을 거야. 한 방송국이 우리나라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 안중근 의사를 아느냐, 그분의 업적을 아느냐와 같은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었는데,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라거나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진짜 의사다”라는 대답이 많았대. 

올해도 어떤 방송국이 길거리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구나. 아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답변한 아이들도 적잖다니 아빠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던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면서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얼마나 부끄러웠다고.

잘 들어둬. 안중근은 조선왕조가 끝나갈 무렵이던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어. 할아버지가 지금으로 치면 시장쯤 되는 현감을 지내고, 아버지도 과거에 합격을 해서 진사로 불리는 양반 집안이었어. 안중근은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지만, 사냥을 좋아해서 말타기나 활쏘기에 더 능했다고 해. 특히 화승총을 이용해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동전을 맞출 정도로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는데,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가리켜 “안 씨 집안의 총 잘 쏘는 청년”이라고 묘사한 적도 있어. 한마디로 부유한 양반집 출신이었다는 말이지.

안중근이 16살 되던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어. 동학혁명이란 전라북도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동학군을 조직하여 들고 일어난 사건이야. 출신이 타고난 양반인지라 동학혁명을 ‘반란’이라고 인식한 안중근의 아버지는 사병을 조직해서 동학군을 토벌했고, 의협심 강한 안중근도 아버지를 도왔어. 이때 동학군의 황해도 책임자가 백범 김구 선생이었고, 그것 때문에 두 집안이 인연을 맺은 이야기는 거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지만, 그 얘길 하자면 삼천포로 빠질 게 뻔해서 여기서 스톱.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그 무렵이야. 안중근과 천주교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라고 할 만한데, 단순히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말고도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나 사람의 권리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어. 실제로 을사조약의 체결로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상해에 갔던 그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도 그곳에서 만난 어느 신부 때문이었어. 진정한 독립을 원한다면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라는 말에 깊은 감화를 받았거든. 

국내로 돌아온 안중근은 진남포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장이 되었고, 교과과정에 군사교육의 일종인 집총훈련도 배정했어. 그런가 하면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나라들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중등교육기관인 삼흥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대부분의 가산을 쏟아 부었지. 

하지만 이런 교육운동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어.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고종의 명을 받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의 밀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세계에 알리려던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우리나라의 법률제정권이나 관리임명권까지도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또 다른 조약을 맺었어. 이것을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하고 ‘정미7조약’이라고도 부르지.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것도 이때야.

울분을 참지 못한 안중근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했어. 조선의군이라고 부르던 이 독립군 단체에서 안중근은 참모중장을 맡았지. 300명 가량이던 이 조선의군은 두만강을 넘나들며 경흥, 회령 등지에서 30여 차례의 싸움을 벌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 

1909년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게 돼. 이미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는데 성공한 일본은 중국 영토인 만주와 러시아까지도 노리고 있던 터였거든.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도 러시아와의 협상 때문이었어. 일본의 침략정책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내려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환영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죽였지.

안중근의 의거는 당시 독립을 바라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쾌거였지만, 친일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어. 우선 대한제국 황제였던 순종은 “우리 나라의 흉수(​凶手, ‘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안중근 의사를 가르키는 말​)에게 사망한 고로 온 나라가 놀라 떠는 것을 이기지 못해 이에 추도한다”라는 전문을 보내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대. 부의금으로 13만 원을 지출하자는 결의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 또 사흘 동안 학교도 휴교를 하고, 시장도 문 닫고, 음악공연도 금지하는 훈령도 내렸어. 심지어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들은 ‘국민사죄단’을 조직해서 “우리 2천만민이 다 같이 도쿄로 가서 죄를 일본 천황에게 고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