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선생님 국어사전에서 표준이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물의 정도나 성격 따위를 알기 위한 근거나 기준.” 그러니 무언가가 표준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사실을 전제하지요.
예를 들어 계량법은 국제적으로 통일되어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질량이 1kg인 금이 다른 나라에서는 1.5kg이라면 어떻게 kg을 사용하겠어요? 1kg이라는 단위는 모든 국가에서 똑같이 사용하는 단위이기에 그것을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과연 표준 세계지도도 ‘표준’으로 삼을 만큼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이멜다_"객관적이고 공정한 세계지도는 없어"
헥터_"표준 세계지도가 문제라면 다른 표준을 만들면 돼."
에르네스토_"표준을 대체 누가 정한담?"
미구엘_ "디지털 형태의 지도를 표준 세계지도로 삼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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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멜다 지구는 둥글잖아요? 그런데 지구본처럼 구 형태가 아닌 종이에 지도를 표시하면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구에는 시작도 끝도 없고 아래도 위도 없는데 종이에 그것을 옮기면 시작부분과 끝부분이 생기고, 마치 중앙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세상의 아래와 위, 시작과 끝 그리고 중앙을 어디로 정하고 싶은지는 사람마다 다를 거예요. 따라서 ‘세계지도의 표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대 통일될 수 없다’라고 생각해요. 객관적이고 공정한 세계지도는 존재할 수 없어요.
헥터 저는 이멜다의 말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게 돼요. ‘표준이라는 건 결국 인간이 편의를 위해 개발한 도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요.
뉴스를 보니 현재 질량 1kg의 기준이 되는 것은 백금 90%와 이리듐 10%로 구성된, 높이와 지름이 각각 39mm인 원기둥 모양의 물체래요. 이 ‘1kg 원기’는 유리관에 담겨 파리 인근의 국제도량형국 지하금고에 보관되어 있대요. 이처럼 우리가 표준이라 여기는 것들 모두 결국 사회적 약속에 불과해요.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백금은 뭐고 이리듐은 뭐야? 구하기도 힘든데 불편하게! 만약 변질되면 어떡해? 1kg의 정의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건가?’ 실제로 최근에 ‘1kg 원기’의 무게가 조금씩 줄어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대요. 그래서 2019년 5월부터는 1kg의 기준이 바뀐다고 하네요.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표준 또한 변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사용해온 표준 세계지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내면 되는 거죠. 변화된 편의성의 기준에 따라서 새로운 표준 세계지도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에르네스토 ‘표준’은 규정하기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늘 ‘표준’은 있어 왔죠. 지금까지 많은 나라에서 메르카토르 투영법[1]을 이용한 세계지도를 표준으로 삼아왔어요. 이 지도는 유럽의 항해시대에는 잘 어울렸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점이 많아요. 실제로 ‘제국주의적 지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고요. ‘새로운 표준 세계지도’를 만든다는 헥터의 생각은 좋아요. 하지만 이 문제의 핵심은 그것을 과연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거예요.
국경의 구분선 또는 지명의 표기법은 현실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동해와 독도’라고 표기된 지도는 사람들에게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된 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죠. 중국과 대만이 같은 색으로 표시된 지도와 중국과 대만이 다른 색으로 표시된 지도도 그렇죠. 중국과 대만을 다른 색으로 표기하면 대만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걸 암시해요. 이런 상황에 ‘표준’이 무엇인지를 대체 누가 정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표준적인 세계지도를 만들어도 지도 제작자의 자의적인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지구 자체가 움직이니까 말이에요! 시간이 흐르면 대륙의 위치와 지구의 자전축이 변하죠. 천재지변에 의해 산이나 산맥이 생겨나기도 하고 때론 도시 하나가 사라지기도 해요. 빙하가 녹는 등의 이유로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지면 육지가 잠겨서 대륙의 모양이 달라지기도 하죠. 이처럼 변화무쌍한 지구를 변하지 않는 지구본이나 지도에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미구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날로그 자료들은 세상에서 점차 사라지고 디지털 자료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잖아요? 어쩌면 지도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아니지, 사실은 벌써 그렇게 변했다고 봐야죠!
방금까지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재밌었어요. 최대한 축척을 크게 해서 보면 꼭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구가 한 눈에 들어오니까요. 반대로 최대한 축척을 작게 해서 보면 제가 있는 위치와 사방으로 뻗어있는 길과 건물들이 보였어요. 마치 그곳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어떤 지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을 때는 그저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하고 건드리면 그만이었어요. 그러면 그곳의 정보뿐만 아니라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사진과 동영상 같은 기록들까지 볼 수 있었죠.
이와 같은 디지털 형태의 지도를 표준 세계지도로 삼을 수는 없을까요? 디지털 시대의 표준이 아날로그일 필요는 없잖아요?
이멜다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구형인 지구를 지면에 옮기면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지면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을 뿐더러, 확대와 축소까지 자유로운 지도라니! 종류별 약도를 챙겨 다닐 일도 없어질 테고, 특히 지도에서 정보까지 검색할 수 있다면 무척 편리할 것 같아요.
하지만 디지털 지도라고 해서 관점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디지털 지도에도 선택되거나 생략된 정보가 있어요. 디지털 지도는 길의 위치나 지명 찾기 등에 적합하게 제작됐어요. 표준 지도가 꼭 지명이나 국경선을 중심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건 아닌데도요. 지명의 표기 문제 등 정치적 의견을 반영하는 내용도 해결할 수 없어요. 2018년에는 애플이 제작한 애플지도에 독도가 ‘다케시마’라고 표기되어 있어 논란을 빚기도 했으니까요.
또, 모든 사람이 디지털 지도를 사용할 만큼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으니 미구엘의 발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지털 기술은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저희 부모님만 해도 디지털 지도를 어려워하시거든요. 또한 디지털 기술 자체가 도입되지 못한 국가나 지역도 존재하고 말이에요.
헥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젠 새로운 표준 세계지도를 만드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지네요. 미구엘의 말대로 디지털 표준 세계지도를 만드는 일이 언젠가는 가능해질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도량형이나 국제단위는 그것을 사용하는 모두가 혜택을 누리지만 세계지도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것만큼이나 불공평한 일이죠!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지도의 중심에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실제로 지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를 펼쳤을 때 나라의 크기나 국경, 명칭이 어떻게 표시되어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예요. 침략자들이 원주민이 살던 땅을 빼앗아 지명을 바꾸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그 원주민의 후예들이 지도를 보다가 조작된 지명을 발견하면 얼마나 화가 날까요?
모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세계지도가 아니라면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지도마다 서로 표시하는 내용이 다른 것이 오히려 건강한 일일지도 몰라요.
에르네스토 맞아요.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한 사람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되죠.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가 나서서 역사교과서를 통일시키는 일(국정교과서 편찬)에 반대했던 거잖아요. 세계지도 자체의 국제적 표준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국가마다, 단체마다, 개인마다 각자의 필요에 알맞은 지도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지도끼리 충돌하는 내용이 있다면 역사자료들을 바탕으로 어떤 내용이 올바른지 따지면 되겠죠.
역사는 계속해서 흐르고 세상은 변해요. 그러니 시대에 따라 지도와 지구본은 계속 새로워져야 해요. 신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추적해서 그 모든 변화를 ‘표준 세계지도’에 반영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요.
미구엘 그러니까 디지털 세계지도를 개발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 당장은 제 생각이 시기상조라는 친구들의 생각이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디지털 표준 세계지도가 개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논쟁적인 지역에는 꼼꼼히 주석을 달아, 사람들이 그곳에서 토론을 벌이게 하는 거예요! 디지털 지도 자체가 일종의 공론장이 되는 거죠! 유레카 학교처럼 말예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긴가요?
코코 선생님 미구엘, 아쉽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들리네요. 하지만 위대한 발명들은 발칙한(?) 상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창의성이 돋보여요. 아무튼 학생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하며 이번 시간을 마칠게요. 이멜다와 에르네스토는 원래부터 반대 입장이었고, 헥터와 미구엘도 결국 반대로 돌아섰네요. ‘표준 세계지도를 사용하는 게 옳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레카 학교의 토론 결과는 ‘그렇지 않다’입니다. 학생 여러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