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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에는 두 거봉이 우뚝 솟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그들이다. 두 사람의 작품은 러시아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문학의 최고봉에 올라섰고, 아직까지도 불후의 명작으로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1828년 영지 야스나야 폴라야에서 백작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부활》 등의 역작을 남긴 대문호이다. 거대한 스케일을 담아낸 이 서사적인 작품들이 한 작가의 손에서 창작된 것이라니 믿기 힘들 정도다.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톨스토이는 결코 양지에 앉아 작품 창작에만 몰두했던 창백한 문인이 아니었다. 당대 러시아의 엄혹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온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일궈낸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전제정치에 신음하는 당시 러시아 민중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농노개혁을 착수했고(물론 실패로 끝났다), 농민의 아이들에게 참된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학교를 세웠으며(그의 교육활동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학교를 수색하기도 했다),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1870년대 후반에 톨스토이는 사상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독단에 기초하여 성립된 서구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을 불신하였고, 부처, 공자, 노자 등 동양 철학에 관심을 돌려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오랜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 동양사상에 깊이 몰두한 그였지만 그의 사상적 뿌리는 기독교 정신에 있었다. 그가 배격한 것은 교회의 권위와 독선, 그에 의해 왜곡된 신비주의적 신앙이나, 기적을 바라고 기복을 비는 이기적인 신앙이었다. 동양 사상, 특히 노자의 사상에 심취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사랑의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었고, 이에 기반하여 독자적인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톨스토이는 예술가보다 사상가, 설교가로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교회나 국가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톨스토이는 정부와 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한편, 1880년 무렵에 겪은 반전(反戰) 체험은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제 이전의 작품과 전혀 다르게, 러시아 농민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1884년 톨스토이는 한 편지에서 민중이 읽을 만한 책을 쓰는 일이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다고 밝히면서 “할 수만 있다면 지난 50여 년 세월 동안 밥만 축낸 짓을 갚고 싶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눈여겨본 것은 복음서와, 민중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민담이었고, 이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재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881년 첫 민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필두로 1886년 무렵까지 집중적으로 민화를 창작, 21편의 작품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