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4
윤리, 철학
목록

통섭,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인문과 과학의 괴리는 뿌리 깊다. 인문학자는 초보적인 과학적 지식을 외면하고, 과학자는 대중적인 문학작품조차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인문적 성찰 없는 과학기술은 맹목이요, 과학기술적 합리성 없는 인문학은 공허한 것이다. 현재 인류가 겪는 숱한 난제들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학문의 통섭은 4차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절박한 요구다.
image

태생적으로 문과 취향인 사람들에게 과학 분야는 그야말로 ‘넘사벽’일 뿐더러 별 관심도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들도 과학 분야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IT 기술혁명이 사회 전반에 본질적이고도 전방위적인 변화를 몰고 온 까닭에 과학적 담론을 무시하다간 밥그릇 보존도 힘든 상황이 왔으니까요. 인문학적 담론만으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식계는 커다란 화두를 안게 되었지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혹은 소통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동안 인류의 학문적 발전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학문 간 구분이 없다가 점차 세분화되었고, 그 결과 더 깊이 있고 전문적인 연구를 이끌어내 혁혁한 성과를 거둬들입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는, 어떤 의미에서 학문 간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크게 봤을 때 자연과학적인 지식, 혹은 인문학적인 지식만으로는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어렵고, 인류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대한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약한 말이 ‘통섭’입니다. ‘통섭’이란 말이 등장했을 때 참 낯설었던 기억이 압니다. 통섭에 관해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에드워드 윌슨인데, 그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는 20세기 말까지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그의 책 《컨실리언스》를, 《통섭》(사이언스북스)이라고 번역해 소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통섭은 성리학과 불교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는 뜻인데, 물론 일반 사람들에겐 생소한 말이었지요. 

그러나 통섭이라는 말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통합’이라고도 하고, ‘융합’이라고도 해서 뭐가 뭔지 헛갈리기도 하지요. 통섭이라는 개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용어가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의 높은 담을 허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통섭이라는 말은 개념 정리도 분명하지 않은 채 다의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여러 논쟁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자연과학의 우위에서 인문, 사회과학을 흡수하려고 한다거나, 자연과학에서 비롯된 개념을 인문, 사회과학이 개념적 근거도 불분명한 채 사용한다는 등이 그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통섭’은 일종의 지적 사기요, 과학과 인문학을 배신하고 있다고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