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여러 갈래의 가지를 친다. 민감한 사춘기 청소년의 방황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다문화 가정과 이주 노동자 문제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툭툭 건드리기도 한다. 또한 장애인과 바보를 등장시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을 폭넓게 일깨우기도 하고, 이웃 간의 정(情)을 회복해야 한다고 성토하기도 하며, 학교 교육 현실의 부조리함을 비꼬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만 다루기도 벅찬 주제들이 저마다 뻗어나가 향하는 곳엔 주인공 ‘완득이’가 있다. 그리고 <완득이>를 자라게 하는 양분은 바로 ‘동주선생’이다.
영화의 시작은 완득의 신세한탄과도 같은 내레이션이 연다. 이어, 굽은 등과 작은 키로 카바레에서 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과 사람들에게 괄시당하는 아버지의 모습, 머리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동네의 모습이 화면을 채운다. 궁핍과 절박함이 절로 묻어나는 배경이다. 완득이 가진 것이라곤 멀쩡한 몸뚱이와 꼽추 아버지, 순박하지만 바보스런 삼촌이 전부다. 어머니는 없다. 아니, 나중에 나타난 어머니는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선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듯 완득은 공부를 못하며, 외롭고, 꿈이 없다.
실상 완득을 둘러싼 이런 모든 환경은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총체적 난관과도 같다.
그런데 정작 완득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바로 이웃 옥탑에 사는 담임 동주선생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있는 동주선생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얌마, 도완득!’을 외치며 완득을 부려먹는다. 완득의 가난한 환경을 아무렇지 않게 헤집고는 ‘뭐 임마!’ 하고 도리어 큰소리치기 일쑤다. 심지어 그는 완득이 받은 학교 보급품 식량을 서슴없이 갈취(?)하고 학생인 완득에게 술을 권하기도 한다. 결코 모범적인 사회선생님은 아닌 거다. 그러니 ‘똥주’ 좀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완득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완득의 가난한 환경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사라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