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건국 후 200여 년 동안 귀족 중심의 사회체제를 구성했다. 특히 문벌 귀족이 대대로 관직과 토지를 물려받으며 권세를 누려왔다. 그러다 고려 왕실의 위엄이 나락을 떨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12세기 초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다.
문벌 귀족 중에 경원 이씨 일족은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들이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급기야 이자겸은 1126년 군사력을 동원해 황궁을 침범, 왕을 유폐시키고 왕이 되고자 했다. 인종이 겨우 사태를 수습, 이자겸을 유배 보내며 일단락됐지만, 왕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이 무렵 승려 묘청이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서경천도),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켰는데(1135년) 개경의 문벌 귀족이 이들을 궤멸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때 즉위한 의종(재위 1146~1170)은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했으나 왕권이 형편없이 약해진 상황이라 쉽지 않았다. 그는 문신들과 함께 궁궐 밖 경치 좋은 곳이나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과 문신들이 여흥을 즐길 때, 무신들은 보초를 서면서 이들을 호위하느라 쉬지도 먹지도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170년 8월 30일, 이날도 의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을 나서 보현원이라는 절로 향했다. 길을 가던 중 잠시 쉬며 잔치를 벌였는데, 왕은 수박희를 명했다. 수박희는 무신들이 즐겨하던 무예로, 서로 붙들고 잡아당기며 상대를 넘어뜨리는 경기였다. 50세가 넘은 대장군 이소응과 젊은 장수가 맞붙었는데, 이소응이 보기 좋게 패했다. 그런데 이때 문신 한뢰가 나서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장군이 군졸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지켜보던 의종과 측근 문신들은 손뼉을 쳐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