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멸망하자 나당연합군을 피해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충남 부여의 낙화암. 여인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흩날리는 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삼천궁녀는 의자왕이 행한 사치와 향락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역사서 어디에도 ‘삼천궁녀’에 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어찌된 것일까?
사실 최후의 날 뛰어내린 사람들은 궁인들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부소산성으로 피난했던 왕족, 그리고 귀족 일가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그중에 군인이 2,500여 명이었다. 군인보다 많은 궁녀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버리고 신라에 나라를 넘긴 폭군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그는 진시황에 비유될 만큼 사치와 향락만을 탐하는 왕이었을까?
의자왕은 왕자 시절 누구나 칭찬해 마지않는 ‘해동증자’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까지 의자왕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해동은 우리나라를 뜻하고, 증자는 공자의 제자 중 효도의 모범으로 불리는 한 인물을 칭한다. 그만큼 주위로부터 매우 좋은 평판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30대 중반에서야 태자에 책봉됐다. 맏아들임에도 서른 넘어서까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은 반대세력에 의한 견제가 심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결국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족과 귀족들에게 태자로 인정될만한 평판을 얻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