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큰돈을 벌고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과연 성공이 인생의 전부일까?
평생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진 게 별로 없었던 의사, 장기려의 삶을 돌아보면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사는 것인 가치 있는 것인지, 어떤 삶이 진정 행복한 것인지. 더 많이 가지려고 다투고 경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삶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길 청한다.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의 이타적 삶,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의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비교적 부유한 기독교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할머니를 꼽았을 정도다. 또한 그의 아버지 장운섭은 신교육에 관심이 높아 장기려가 여섯 살 되던 해 의성학교를 세우고 장기려를 그곳에 다니게 했다.
기독교 신앙과 신교육을 배운 부유한 집안의 아들. 1923년 의성학교를 졸업한 장기려는 고향을 떠나 개성의 송도고보에 들어갔는데, 당시 그는 여느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처럼 꽤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냈다. 한창 유행하던 테니스에 매달렸고, 저녁을 먹은 후엔 거의 매일 친구들과 화투놀이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공부라고는 시험기간에만 반짝 몇 시간 벼락치기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장기려는 곧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송도고보 1, 2학년이 방황의 시기였다면 3, 4학년은 반성과 성숙의 시기였다. 그는 부족한 학업도 금세 만회, 송도고보를 1등으로 졸업한다.
처음에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교사가 되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도 있다. 실력도 부족하고 학비도 충분하지 못해 교사의 길을 포기한다. 이후 장기려는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여순공과대학 예과 시험에 불합격 하면서 다시 한 번 좌절의 아픔을 겪는다. 당시에는 사범대학과 공과대학이 인기가 많아 입학이 어려웠다. 송도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에게도 대학 입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