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3
예술, 문학
목록

<아버지의 땅>,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고리 ,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역사적 상흔(傷痕)’이라는 말조차 무색한 시대다. ‘현재’를 살아가는 데 급급한 우리는 이제 역사의 상처 따위는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사들은 ‘역사’라는 감옥에 갇혀 그 생동하는 의미를 잃은 채 교과서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6·25 전쟁이야말로 대표적인 예다. 6·25는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보였으나, 종전 후 후손들은 그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하지만 흙은, 조국의 땅은, 그 잔인한 역사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사람들을 깊숙이 품고 있다. 무덤도 묘비도 없이 누워 있는 그들. 가끔씩 그들은 앙상한 유골을 드러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image

낯선 역사 속으로

나의 할머니는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어릴 때 동학혁명을 겪었던 할머니는 가끔 녹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라는 창가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 창가는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이 들었고, 우리 할머니가 불렀고, 그리고 내가 아는 노래다. 할머니에게 동학혁명은 몸소 ‘체험’한 생생한 ‘현재’였다. 

할머니의 아들인 아버지의 허리께에는 총상으로 생긴 상처가 깊게 패여 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부상을 입었다. 가끔 아버지는 부상당한 자신을 전쟁터에 버려두지 않았던 전우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에게 한국전쟁은 결코 망각된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딸들과 아들들은 6,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따라서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70년대의 유신시절과 80년대의 군사정권 시절,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박제된 역사의 한 장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역사는 그것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생생한 ‘현재’이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묵은 ‘과거’다. 현재와 과거가 이처럼 세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건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현재’ 안의 역사 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 구조가 얼마나 치밀하게 담겨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삶 속에 아버지의 역사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잠재해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의 삶 속에 할머니의 그것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 역시 마찬가지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현재 군복무 중이고, ‘나’의 아버지는 월북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역사는 현재의 ‘나’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상처는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의 그 죄라는 것을 내 스스로 함께 나누어 지니고 만 느낌이었고, 그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눈빛이 깊고 어두운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은 그의 첫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한국전쟁과 분단문제를 독특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독특함은 전후세대의 눈과 경험으로 한국사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들 속에서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이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분단 문제가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동시대의 삶과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피피선(군용 유선 화선)에 옥죄어 30여 년을 묻혀 지낸 한 유골을 통해 분단의 상처가 어떻게 현재의 삶을 왜곡하고 있는지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