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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중국

실크로드와 중국의 일대일로

지난 시간까지 1500년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의 수많은 제국을 길러낸 내륙 실크로드의 영화로운 시절을 다각도에서 살펴봤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실크로드와 그 주변의 유목 제국은 서서히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어째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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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의 부흥, 육지길의 쇠락

내륙 실크로드와 그 주변 유목 제국이 활력을 상실한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무엇보다도 바닷길을 통한 동서 무역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말과 낙타에 짐을 싣고 도보로 먼 길을 가야만 했던 대상(​隊商, Caravan​)들은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나야 하는 지역의 사회·정치 상황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당 지역이 사회·정치적으로 불안하면 당연히 치안 또한 불안하니,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운이 좋아 모든 게 다 순탄히 흘러간다 해도 일단 육지로 이동하면 상당한 소요시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배를 통한 동서 교역은 상대적으로 빠르고 안전했다. 한 번에 훨씬 더 많은 짐을 옮길 수도 있었다. 당시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17세기 초 스웨덴 함선 바사(Vasa)호를 보자. 길이 69m에 배수량이 1200t에 달하는 범선으로, 450명 내외의 인원이 동시에 승선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처럼 큰 배라면 화물을 대략 70만~80만㎏ 이상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보통 낙타 한 마리가 운반하는 화물의 무게가 300㎏ 정도이므로, 바사호는 대략 낙타 2500마리를 합친 것과 비슷한 능력을 갖췄던 것이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 한 팀이 낙타 300~400마리 내외로 구성되었음을 떠올리면, 바사호 한 척은 대상 6~8팀과 맞먹는 운송 능력을 지녔던 셈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말과 낙타를 이용한 교역은 해상 수송과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유목 제국의 막강한 기병, 총에는 당해낼 수 없어

내륙 실크로드와 유목 제국이 활력을 잃어버린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총기의 등장이다. 기술의 발달로 근대적인 개인 화기가 보급되면서 기병(騎兵)이 군사력의 중심이던 시대가 지나가 버린 것이다. 말과 활은 2000년 동안 유라시아 제국의 전략 무기였지만, 총으로 무장한 보병 앞에 제아무리 빠른 말을 탄 용맹한 병사라도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러시아의 동태였다. 당시 러시아군은 총기로 완전 무장한, 근대 세력의 대표격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군사를 파견,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주변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20세기 초반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모든 중앙아시아 지역이 소비에트 연방으로 통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실크로드 주변 유목 민족의 힘은 약화되었고, 전통적인 동서 교역 루트로서 실크로드가 지녔던 활력 역시 사라져 갔다.  

연안 도시 떠오르며 내륙 저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