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열네 살에 일본에 건너가 줄곧 거기서 살았지만 한 번도 국적을 바꾼 적이 없다. 50년이 넘도록 귀화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 1세.
대체 무엇이 그를 김천의 작은 땅에 매어둔 것이었을까? 그가 귀화하지 않은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서.
진창현의 고향은 경상북도 김천군이다. 1929년, 그곳의 작은 마을 이천에서 아버지 진재기와 어머니 천대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후처였다. 아버지의 나이 여섯 살에 얻은 열여섯 살의 첫 번째 부인이 세상을 뜨자 새로 아내를 들였다. 당시에는 집에 여유가 있을 경우, 세 살 정도의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은 경제적 부담을 덜고 배불리 먹고 살기 위해 결혼을 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첩도 있었기에 호적상 그의 형제는 모두 여덟, 그는 여섯째 아이였다.
어머니의 창현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젖이 말라버려 젖동냥을 하며 그를 키운 일, 참고서가 필요하다고 해 몰래 쌀 한 가마니를 훔쳐 주었던 일 등은 아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그가 어머니를 더욱 가슴 뭉클하게 기억하는 것도 그런 따뜻한 모습 때문이 아닐까. 그에게 어머니는 그만큼 각별했다. 어머니와 고향 김천은 ‘조센징’이라며 멸시를 받고 고된 학업을 이어가는 일본의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이번엔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사실 그가 처음부터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저 우연한 두 번의 만남과 좋은 소리에 대한 감동이 그를 이끌었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그의 꿈은 교사, 전투기 조종사, 화가 등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와 바이올린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