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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무산일기>, 치열하게 견뎌야 했던 생존의 파편

영화는 실존인물이자 탈북자 전승철의 이야기다. 감독이 2008년에 연출한 <125 전승철>의 확장 버전. 그러나 <무산일기>의 탈북자는 사람고기 먹어봤냐며 등골 오싹한 대사를 읊지도, 북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다며 눈물 훔치지도 않는다. 총과 무술로 다져진 특수대원도 아니며, 비극의 역사 속 피해자의 모습도 아니다. 감독은 오히려 그런 상상을 하는 관객에게 ‘니들이 탈북자를 알아?’라며 되묻는 것만 같다. 그러니 섣부른 연민 따위는 이 영화에 가져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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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입국한 북한 이탈주민의 수는 2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무산일기>는 우리 곁에 늘 존재하지만 투명인간처럼 인식되지 않는,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한 채 귀신같이 떠도는 탈북자들에 대한 남한 사회의 시선을 짐작할 수 있는 영화다.  

실제로 박정범 감독과 친분이 있었던 전승철 씨는 오랜 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고, 떠나기 전 ‘형이 만든 영화를 보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영화 <무산일기>. 주인공은 당연히 전승철 씨고, 우리는 그가 살았던 남한 사회에서의 나날 일부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가 영화와 똑같은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즐거웠는지, 힘들었는지, 이미 그에게 듣기엔 너무 늦었으므로. 다만, 우리는 영화 속 전승철을 통해 대다수 탈북자들의 생활을 가늠할 뿐이다. 그들의 삶은 철거촌의 무너진 벽과 철조물이 드러난 벌건 땅 만큼이나 황폐하고 불안정하다. 한 인간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묘사하고 그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그려내는 감독의 손길을 따라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혹은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살았던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묵직한 반성과 책임감 같은 것이 조용히 솟아오른다. 

주민등록번호 125, 그 주홍빛 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