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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 안개 너머에 있던 것들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안개는 대개 의혹이나 혼란, 공포를 상징한다. 어느 순간, 주변을 뿌옇게 휘감으며 시야를 가리게 만드는 그 특성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독서토론에서 다루었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도 그 주된 메타포는 역시 안개였다.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 그리고 흐릿하게만 보이는 미래를 그처럼 잘 설명해내는 개체는 찾기 힘들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볼 영화는 그 제목이 아예 안개, 즉 ‘미스트(The Mist)’다. 평화롭던 일상에 갑자기 닥친 거대한 안개.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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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근원을 파헤치다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로스트>는 비행기 사고로 승객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섬에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그 미지의 장소에서는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사이에 생겨나는 여러 복잡 미묘한 관계는,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로스트>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과 영화 <미스트>가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두 작품 모두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기 쉬울 것 같다. 인간의 공포심은 바로 미지의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

<로스트>가 편히 비행기 여행하던 사람들이 영문 모를 장소에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면, <미스트>는 거대한 태풍이 그 서막을 장식한다. 불길한 징조는 늘 천재지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단란한 가족의 가장이자, 영화 포스터 전문 화가인 주인공 드레이튼은 태풍의 수습을 위해 어린 아들과 시내의 대형 마켓으로 향한다. 마켓 안은 태풍 때문에 사재기를 하려는 마을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 빼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보기 풍경.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와 소리친다.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피투성이가 된 그는 자신의 친구가 안개 속에서 사라졌다고 오열한다. 그리고 그 짙은 안개는 마켓의 창밖 바로 앞까지 다가와,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갑자기 안개 속에 무언가 있다고 격앙되어 소리 지르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 보통이므로. 하지만 지진과도 같은 거대한 흔들림이 온 건물을 떨리게 만들고,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안개에 잡혀먹기나 한 듯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갑자기 닥친 얼음장 같은 공포. 이제 오도 가도 못하는 그들의 상황은 폐쇄공포증까지 일으킨다.

<미스트>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와 닮아있다. 평화로운 일상에 불쑥 찾아온 부자연스럽고 비극적인 재난. 감이 좋은 누군가, 혹은 다른 사람 보다 먼저 불행을 겪은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경고하지만 일상의 평이함에 젖어있는 타인들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재난의 무시무시한 힘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비정한 현실을 파악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말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이러한 클리쉐는 왜 생겨난 것일까? 자연의 거대한 힘을 무시하는 인간의 나약하고 안이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어쨌든 그 효과는 아직까지는 대부분 유효한 듯싶다. 재난의 징조를 알아채지 못하고 위험 앞에 맨몸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좀 뻔하다 싶어도 긴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