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억을 한다. 기억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역시, 기억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릴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영화, 잊지 못할 만큼 즐거웠거나 슬펐던 사건 등 과거의 순간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무언가 보고 배우고 느끼며 성장하는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만일, 그 중요한 힘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메멘토>는 그러한 상황에 놓인 한 남자의 비극적 이야기이다.
<메멘토>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1년 작품이다. 작년 <인셉션>이라는 영화로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고,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 대해 풍부한 고찰을 보여주었던 그는 이미 십 년 전에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인셉션>에서 인간의 숨은 욕망을 무의식의 바다로 표현되는 ‘꿈’으로 풀어냈다면, <메멘토>에서는 기억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셉션>을 곱씹어 볼수록 <메멘토>가 떠오르고, 또 <메멘토>를 생각할수록 <인셉션>이 연상된다.
그런데 <메멘토>는 <인셉션>보다 더 혼란스럽다. 일반적인 서사구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가 풍기는 불친절하고 제멋대로인 냄새에 심사가 뒤틀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영화가 개봉한 당시 관객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이들과 감독과의 두뇌싸움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 또 극장을 찾는 이들로 나뉘었다.
영화는 어떤 살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확하게 말해 이 씬은 ‘시작’이 아니다. 시간상으로는 영화 모든 사건들 중 제일 나중에 벌어지기에, 그러니까 ‘결말’에 가깝다. 주인공 레너드는 방금 테디라는 남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남자의 시체를 찍는다. 마치 채증을 하는 경찰처럼 신중하게 사진을 흔드는 그. 화면 가득 사진의 이미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는 계속 사진을 흔든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서서히 드러나던 필름 위의 형태가 어느 순간 다시 점점 하얗게 사라지고 만다. 정말 그 사진에 기록된 것이 진실인 것일까?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하고, 레너드의 살인 장면이 역으로 편집되면서, 우리는 이 살인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이 굉장히 인상적인 오프닝 장면은 영화 전체를 간단하게 상징한다. 영화 전체를 통해 시간이 역주행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