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드라마에서 재벌 아들이 가난한 집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재벌집 부모는 다음과 같은 진부한 대사를 날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여러분이 이런 처지라면 어떻게 하겠어? 얼른 달려 나가서 흙을 한 줌 집어 올 테지. 자신의 결혼 상대를 자신이 정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니까.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자녀는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와 결혼해야 했어. 일반 백성은 물론, 양반, 심지어 왕도 부모가 선택한 사람을 배우자로 들였지.
<맹진사댁 경사>[1]는,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서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희곡이야. 주인공 맹진사는 권력자인 김판서댁과 사돈을 맺고 싶어서 사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무남독녀 갑분이를 시집보내기로 해. 근데 소문이 돌길 그 집 아들이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라지 뭐야. 체면상 결혼을 취소할 수는 없고, 장애인에게 딸을 보내기도 싫은 맹진사는 몸종 입분이를 갑분이처럼 분장을 시켜 혼인시키기로 해. 그런데 혼인날 등장한 신랑은 신체 건장한 사내였어. 결혼식이 끝난 뒤 신랑은 당황한 입분에게, 가문이나 외모보다 진실한 마음을 원하는 아내를 맞고 싶어서 가짜 소문을 퍼뜨렸다고 실토해.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반전에 박장대소를 하고 막이 내려.
이런 스토리가 가능한 건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데다, 혼인날 결혼 상대를 처음 본다는 설정이 가능한 시대여서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다행히 세월이 흐르면서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고, 그리하여 지금처럼 배우자를 자신이 정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
그러나 결혼 문화가 이렇게 변화하는 동안 과도기가 있었을 거야. 결혼 상대를 골라 주겠다는 부모의 고집에 맞서서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겠다던 때가.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웠겠어? ‘효도’라는 가치규범을 생각하면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게 옳지만, 결혼이라는 중요한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기결정권’의 가치를 따지자면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처럼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도 사회의 규범도 믿기 어려워서 우왕좌왕하다가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는데, ‘아노미(Anomie)’는 이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