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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우리네 영화의 시작

영화를 만드는 나라는 의외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할리우드만큼의 영향력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영화가 전 세계 관객들을 모으고 호평까지 받는 역량을 갖췄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우리 영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건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 영화를 만들려는 노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26년 나운규가 감독한 <아리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아니지만, 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우리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았다. 
먼저 <아리랑>이 어떤 작품인지, 현재의 영화 정보 형식으로 꾸며본 글로 간단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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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이 만든 조선 영화

나운규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은 당시 영화계의 시대적 요구, ‘조선 사람이 만든 조선 사람의 생각이 담긴 영화’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영화 산업이 성장하는 중에도, 일제 치하 일본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영화 산업 환경에서 조선 사람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제작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선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우리 영화’를 만들려 노력했다. ‘우리 영화’를 원했던 건 조선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극장을 차지한 영화 대부분이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 들어오는 데다, 자막 및 변사의 해설이 대부분 일본어라 언어 차이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조선 관객들이 많았다. 게다가 영화 스토리도 비슷비슷한 신파극이 많아 관객들이 슬슬 식상함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작진과 관객의 지향점이 맞으며, 더디긴 해도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가 나왔다. 조선 사람이 만든 첫 작품은 1919년 극단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이 만든 활동사진 〈의리적 구토(​仇討​)〉다. 연극 중간에 삽입하는 짧은 영화였지만, 관객들의 호응이 폭발적이어서 극단이 한 달간 장기 공연을 했을 정도였다. 이후 조선인 제작진이 참여한 영화가 간간이 등장했는데, 다수가 <장화홍련전><심청전> 등 옛 고전 소설을 그대로 옮긴 작품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의 경성 극장가는 1차 대전 직후 새로운 영화 성지로 떠오른 할리우드가 점령하고 있었다. 고전을 그대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새로운 창작극이 필요했다. 

<아리랑>은 조선 사람이 만든 최초의 창작 시나리오 영화로 참신함과 높은 작품 완성도로 화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누구도 다루지 않은 조국의 현실, 조선 사람들의 삶과 한의 정서를 담아냈다. 마침 <아리랑>이 나왔던 1926년은 한동안 침체하였던 국내 독립운동의 열기가 다시 한번 치솟았던 시기였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관객들은 <아리랑>을 보며 가슴 속에 묻어둔 나라 잃은 설움을 떠올리며 눈물지었다. 당시 경성 시내 극장은 연일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심지어 영화관이 없는 시골에서는 일부러 가설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할 정도였다. 

영화는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을까 


처음으로 ‘영화’가 국내 신문에 언급된 건 1903년 6월 24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활동사진 광고다.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국내 및 다른 여러 나라의 경치를 찍은 활동사진을 입장료 10전에 보여준다는 내용이다. 당시 다른 나라도 그랬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라는 새로운 볼거리에 열광했다. 
그러나 국내에 영화가 들어온 건 보다 이전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초의 영화가 나온 1896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영화가 들어오기까지는 약 1년 반밖에 소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가 등장한 189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에 신문물이 활발하게 유입되던 시기라, 많은 영화사 연구가들은 영화도 이 무렵에 들어왔다고 본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영화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는데, 그는 조선에서 활동사진이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된 시기가 1897년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시대, 관객과의 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