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서 조선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소보다 말이 더 많았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부터 국가 차원에서 농본정책을 펼치며 소 개체수를 늘렸다. 농사짓는 데 소가 필요한 동물이라는 이유 말고도, 소고기 소비량이 늘어서였다.
고려의 국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였다. 그때만 해도 식생활이 채식 위주였다. 그러나 고려 말, 육류를 주로 먹는 유목민족인 원의 지배를 받으며 밥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상류 계층에서 육식 문화가 퍼진 것을 시작으로, 조선 건국 무렵엔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조선 왕실에서는 늘 소고기 반찬을 찾았다. 게다가 유교식 제사에서 소는 돼지, 양과 함께 필수 제수. 하지만 돼지와 양은 소에 비해 사육하는 경우가 적었던 터라, 주로 소고기가 제수로 올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고기를 먹을 명분은 넘쳤다.
역대 조선 임금 중 고기 사랑으로 유명한 군주는 세종이지만, 가장 다양한 소고기 부위를 즐긴 왕은 연산군이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그가 폐나 콩팥, 우심적[1]은 물론 육즙까지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절 지방에서 왕에게 소고기를 진상할 때 소를 한꺼번에 8~9마리나 잡았다고 한다. “소고기를 제사 지낼 때 말고도 일상 음식으로 먹자”고 제안할 만큼 연산군의 소고기 사랑은 대단했다. 하지만 흉년이 들면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임금이 반찬 가짓수나 끼니 횟수를 줄이는 게 왕실의 미덕이었던 시절, 탐식을 위해 농사의 주요 동력인 소를 많이 도축하자는 연산군의 주장은 이래저래 밉상으로 비쳐 반정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한 후에도 소고기 소비가 줄지 않기는 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도 왕실 못지않게 소고기를 먹었다. 그 시절 상류층은 학생 시절부터 소고기에 맛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체력 보충하라며 주기적으로 소고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소고기 반찬은 성균관뿐 아니라 사학[2]에서도 제공되었고, 심지어 학생이 없는 시기에도 소 도살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도성은 물론 지방 고을에서도 각종 잔치나 제사를 빌미로 소를 잡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