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발굴 작업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지난 5월, 국립박물관 학예관보 정양모 씨와 함께 강진 사당리를 찾았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어떤 아주머니가 아들이 모았다며 보여준 사금파리는 예사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붕에 쓰는 암막새의 문양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청자 특유의 맑은 푸른색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히며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분 좋은 짜릿함. 우리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기뻐했다. 서울에 갈 때까지는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언론은 물론 주변에도 비밀에 부친 채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은사인 고유섭 선생님은 개성박물관에 전시된 청자들 중에서도, 청자 기와 파편을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 청자를 만들 수 있는 건 한국과 중국뿐이었지만, 중국에선 청자 기와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우리 청자야말로 세계에 몇 안 되는 유물인데 깨진 조각만 나온 게 못내 아쉽다면서, 청자 기와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가마터란 가마터는 전부 찾아다니는 걸 함께하며, 어느새 나도 청자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졌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선생님을 대신해 그 청자 기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은 갈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곳에서라도 청자 기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막연하게 바랐다.
그리고 오늘, 한 달간의 발굴 끝에 선생님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청자 기와 조각이 대량 발견되었다. 수키와, 막새기와 등 조각이 500여 편, 모양이 거의 온전한 기와도 10개에 달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났다. 그동안 청자 기와를 찾아다니느라 마을을 기웃거리다 간첩으로 오해도 받고 경찰서 구경도 여러 번 했지만, 청자 조각을 발견한 순간 그런 건 전부 잊어버렸다. 그저 선생님이 이걸 보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만든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그릇과 흡사하다. 이후 고대 이집트에서 그릇 채색법과 유약 처리 기법이 전해졌다. 유약을 입힌 도기는 표면이 매끄러워 음식물이 달라붙지 않아 한층 편리했다. 중국 한(漢)대에 도기를 불에 굽는 기술을 고안해 내면서, 도기는 다시 자기로 발전한다. 가까운 한반도는 물론 서역에서도 배를 타고 도자기를 사러 왔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중국의 도자기는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다.
신라 후기인 9세기경 중국에서 청자 제조 기술이 전해지며, 국내 자기의 미적 수준은 한층 발전한다. 어두운 색감의 중국 청자와 달리, 국내 청자는 맑고 투명한 색감을 자랑한다. 일명 ‘비색’이라고도 하는 고려청자 특유의 맑고 오묘한 색은 청자의 본고장인 중국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를 방문하고 쓴 견문록에서 “도자기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 하며, 최근에 더욱 세련되어졌고 색이 가히 일품이다”라고 극찬했다.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 기법도 점차 복잡해졌다. 초기 청자만 해도 무늬가 없었지만 이후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11세기 후반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반죽을 건조하기 전 겉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메우는 ‘상감기법’을 선보인다. 귀족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12세기는 상감청자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왕실은 상감청자 제작을 적극 지원했다. 하나의 상감청자를 빚는 데 걸리는 시간은 70여 일, 공정 단계도 24단계에 달했던 만큼 소수만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었다. 《고려사》 기록 중에는 1157년 궁 뒤편의 비원에 연못을 조성하고 정자 지붕을 청자 기와로 덮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귀한 청자로 지붕을 덮는 건 그야말로 사치의 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