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한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_ <비 오는 날> 발췌
소설의 첫 단락이다. 형사 같은 매서운 눈(?)으로 추론이란 걸 한번 해보자. 우선 등장인물은 원구와 동욱, 그리고 동욱의 여동생 동옥이다. 소설은 그들 남매의 얘기가 펼쳐질 기세고, 원구는 그들을 지켜보는 관찰자 자리에 서 있을 모양이다. 그런데 동욱 남매의 형편이 말이 아니다. 원구는 이들의 생활을 ‘음산한’ ‘쓰러져가는’ ‘우울하게’…와 같은 말들로 수식하다가 한 마디로 정리해버린다.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라고. 이쯤에서 호기심이 인다.
그들은 어쩌다가 ‘비에 젖은 인생들’이 된 걸까?
<비 오는 날>은 1953년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동족 간의 잔인한 전쟁은 1950년 발발해 1953년 7월에야 휴전협정을 맺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한국전쟁 시기고, 원구와 동욱 남매가 사는 곳은 피난지 부산의 빈민촌이다. 원구는 잡화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비가 와서 판을 벌이지 못하는 날이면 종종 동욱 남매를 찾아간다. 원구의 친구 동욱은 대학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인텔리다. 그는 소아마비를 앓아 불구의 몸이 된 여동생 동옥과 1·4후퇴 때 월남했다. 이들 남매는 동옥이 그린 초상화를 미군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형편이 여의찮다. “불구인 그 신체와 같이 불구적인 성격”을 가진 누이가 동욱에겐 짐스럽다.
냉소적인 동옥 탓에 사람들이 모여 살지 않는 외진 곳에 집을 얻었는데, 그 집이 한마디로 가관이다. 원구가 보기에 폐가나 진배없었고, 도대체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나 있을까 싶었으며, 아이들 만화책에 나오는 도깨비 집 같았다. 남매는 토굴 속 같은 곳에서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다. 불구의 동옥은 “맑은 날일지라도 일절 바깥 출입을 않고 두더지처럼 방에만 처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