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중심주의란 예술작품을 이해할 때 작가의 의도를 중심으로 삼는 입장.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의문을 갖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괴테가 이 책을 쓴 의도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괴테가 어떤 집안에서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삶의 궤적을 좇고,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가 하면,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인지 등을 연구한다. 이러한 것들이 작품 이해의 핵심적인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작가 중심주의는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작품 이해의 올바른 태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작가 중심주의는 작가의 의도만 지나치게 중시해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철저히 제한하는 경향이 강하고, 독자를 수동적인 태도로 전락시키는 등 권위적인 비평 태도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보완으로 등장한 것이 작품 중심주의다. 작품 중심주의는 예술작품은 오로지 예술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예술작품의 이해와 해석에서 작가의 삶이나 시대적 배경 등을 배제하고 작품 자체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작품 중심주의 역시 작품의 의미가 작품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중략)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몰라서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였다. 가난했지만 어릴 때부터 늘 클래식 음반을 틀어놓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오닐은, 음악은 먼저 듣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목이나 작가 혹은 스토리를 알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느끼고 관심이 가는 작품을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 순서라는 이야기다.”_‘느낌의 정답’(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과 교수)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작가 중심주의, 작품 중심주의적인 비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치러야 한다”며 해석의 중요성과 독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저자의 작품은 무(無, 혹은 0)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며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섞여 직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며, 이 “다양성이 집결되는 장소가 바로 독자”라고 말한다. 텍스트는 독자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받아들여지므로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예술작품은 독자의 해석을 거칠 때 완성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