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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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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테이프 현상,

규제와 매뉴얼의 불합리성을 빗대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공무원은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인다. 돈을 넣으면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그들에게 ‘서류’와 ‘규정’을 넣으면 ‘결재’가 나온다. 이처럼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는 현상을 레드 테이프 현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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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와 공무원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나오는 공무원 모습은 좀 한심해 보여.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에 방해만 될 뿐이지. 능력도 변변찮아 보이고. 그런데도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내세우며 거들먹거리다가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고 나니까 그제야 자기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 양 큰소리를 치네. 201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런 공무원이 사회적 약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다니엘 블레이크는 직업이 목수인데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고, 그래서 관공서에 실업 급여를 신청하러 갔어. 그런데 규정상 실업 급여는 인터넷을 통해 신청해야 한다는 거야. “난 목수거든. 컴퓨터 근처도 안 가봤소.” 다니엘 블레이크가 이렇게 하소연을 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무시해버리고 말지. 그는 할 수 없이 주위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신청을 했는데 이번에는 구직 행위를 했다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거야. 아니, 심장이 나빠서 일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직업을 구하겠냐고? 그래도 수당을 타야 했던 블레이크는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보지만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담당공무원은 어쨌든 구직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인정해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해.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야. 심장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 실업 급여를 타야 하는데,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구직 행위에 대한 증거를 제출해야 하다니. 

영화 속 공무원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여. 돈을 넣으면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그들에게 ‘서류’와 ‘규정’을 넣으면 ‘결재’가 나오지. 이처럼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 ‘레드 테이프 현상’이야. 17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용어인데 영국의 관료제도와 행정편의주의를 얘기할 때 많이 언급되는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 레드 테이프라고 부르는 걸까? 당시 영국 관청에서는 공문서 뭉치를 붉은 띠로 묶어서 보관했대. 여기서 유래해서 관청의 형식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각종 규제의 폐해를 빗댄 용어가 됐어. 한자어로는 번문욕례(​繁文縟禮​)라고도 해. 규칙이 너무 자세하고 번잡해 비능률적인 현상을 뜻해. 
그런데 이런 일이 꼭 공무원이 있는, 관료제가 엄격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냐. 군대나 경찰서는 물론 회사나 학교처럼 대부분의 조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야.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5월은 동복과 하복을 함께 입어도 되는 기간이고, 6월부터는 하복만 입어야 해요. 그런데 6월 1일 첫날 날이 추워서 동복을 입고 갔다가 벌점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