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패러디는 새로운 창조” |
패러디는 분명 원본을 참조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는다. 그대로 모방하는 작업은 가치 없는 행위일 뿐이며, 표절이나 원본의 권위에 기댄 패스티쉬에 불과하다. 패러디에 대한 정의에서 보듯, 패러디는 단순히 원본의 모방이 아닌, 원본을 정밀하게 분석해 그 작품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으로,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새롭게 보도록 유도하는 표현형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는 근본적으로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원본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의 문명의 위대함을 다룬 《로빈슨 크루소》를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작품으로 패러디해 근대적 합리성을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패러디의 힘이다. 패러디의 역사가 그토록 오래된 이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본래 하나의 작품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세계 속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해석되고 창조되고, 창조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가 느끼는 예술적 감흥이란 아름다움, 슬픔 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폭로와 풍자, 해학, 익살, 날카로운 비판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통쾌함 등도 모두 예술적 감흥의 영역이다. 인용과 모방의 한계를 뛰어넘는 패러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른 작품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을 통해 성공적인 패러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예술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순전히 철학적인 나의 화제는 (대니얼 디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발전 단계에 있어서 두 가지 문명(로빈슨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기독교/방드르디로 대표되는 제3세계)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고독으로 인하여 한 인간의 존재와 삶이 마모되고 바탕으로부터 발가벗겨짐으로써 그가 지녔던 일체의 문명적 요소가 깎여나가는 과정과 그 근원적 싹쓸이 위에서 창조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투르니에가 말한 작품의 주제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프랑스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20세기에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근대적 이성을 갖춘 백인 선원 로빈슨이 야만의 세계 무인도에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한 산업사회를 얼마나 훌륭하게 창조했는지 리얼하게 그려나갔다. 하지만 디포의 로빈슨이 만든 사회는 식민제국주의라는 불행한 결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투르니에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이 소설에서 근대 ‘문명’을 전복한 자유로운 신인류 방드르디(프라이데이)를 창조, 새롭고 창의적인 탈근대적 가치와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디지털 복제는 분명 원본을 차용해 뒤틀고 비꼬아 알기 쉽게 일상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력을 일깨워준다. 누구나 패러디를 간단하게 제작하고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뜨릴 수 있다. 일각에서는 현재 인터넷상을 달구는 패러디물이 예술장르의 패러디와 달리 오락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지금 창작된 이러한 패러디물 역시 패러디의 근본적인 가치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일례로 첨예한 쟁점이 나타날 때마다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 패러디물을 살펴보자. 네티즌들은 영화 포스터를 변형해 새로운 의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어떤 영화 포스터를 선정하고, 어떻게 문구를 바꾸느냐에 따라 그 패러디물의 의미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처럼 원작을 이용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아가 정치, 사회 문제를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패러디물은 분명히 창작행위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