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2000년 봉건 왕조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근대적인 공화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혁명세력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하기만 하면 중국이 서구나 일본 같은 근대적 국가로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청조의 몰락으로 중국 사회를 유지하던 권력 시스템이 갑작스럽게 붕괴했지만, 새로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거대한 중국 영토의 각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이 현저히 부족했다. 권력의 공백은 거대한 무정부 상태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전체 중국의 운명도 위태로웠지만, 무엇보다 지역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민족 정권이었을지라도 청조의 지배 체제가 유지되고 있던 상황에서는 지역의 치안과 행정이 나름 정상적으로 작동했었다. 그러나 중앙 권력이 붕괴하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도 나타나지 않자 지역의 크고 작은 무력들이 적나라한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청은 19세기 이후 지방에 주둔하는 중앙군의 조직을 확대하지 않고, 지역의 재원과 인원으로 조직된 별도의 지방 군대를 건설하여 지방의 치안과 방위를 맡기고 있었는데, 황제의 중앙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이 지방군이 고스란히 지방의 실력자, 야심가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중국의 각 지역은 그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장세력, 즉 실질적으로 군벌(軍閥)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천년 가까이 이어온 통일 중국이 춘추전국 시대와 같이 여러 개의 지역으로 분열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지역의 백성들에게 새로 등장한 군벌 정권이 청나라의 정치 시스템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이다. 각 지역의 군벌들은 서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일순간 온 나라는 준전시 상태로 접어들었다. 청나라의 관원들보다 훨씬 더 무서운 무기로 무장한 병력이 아무런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일상의 생활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처벌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서운 세상’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이처럼 일상화된 사회적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백성들 스스로 무장을 하거나,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세기 이래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비밀결사의 무장 세력화 경향 역시 더욱 가속화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진_1920년대 군벌시대 당시 중국의 세력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