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 광고를 보는 것, 영화를 보는 것, 한편의 시를 읽는 것, 한 점의 그림을 보는 것, 늘 흐르는 수많은 영상들을 감상하는 것 등.
그리고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 곳곳에 소비자들의 구미에 꼭 맞는 장치들을 숱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마치 덫에 걸리듯 그 장치에 취해 쉽게 카타르시스에 이른다. 대개 이 장치는 사실을 부풀려 만든 하나의 허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이 큰 호평을 받았다. 과연 이정재가 열연한 ‘수양대군’은 진짜 ‘수양대군’에 얼마나 근접했을까? 과장된 표정, 목소리로 만들어낸 가짜 수양대군을 통해 사람들은 ‘수양대군’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허상이 만들어낸 앎은 오히려 진짜 수양대군을 아는 길을 방해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된 ‘수양대군’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일까?
브레히트의 <학살자>에서는 진짜 무라토프 총독이 가짜 무라토프 총독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이 간결한 에피소드를 통해 브레히트는 사실을 부풀려 만들어낸 허상이 얼마나 진실을 가리는지 예술 창작자들에게 묻는다. 사실 이 물음은 브레히트 당시보다도 상업적 영상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더 절실한 울림을 선사한다.
요즘에는 브레히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는 연출 분야에서 ‘낯설게 하기’ 혹은 ‘소격’ ‘거리두기’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예술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학살자>는 브레히트가 남긴 몇 안 되는 소설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