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명나라가 조선에 강력한 요청을 해왔다. 요동지방에서 급격히 세력을 키운 여진족을 치려 하니 즉각 군사를 정비하여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의 최대 위협세력으로 성장한 여진족은 급기야 명의 경제적 요충지인 청하를 점령했고, 그 불똥이 조선으로 튄 것이다.
명나라의 파병요청서는 대략 이랬다.
“이번에 북쪽 오랑캐가 보잘것없는 무리를 선동하여 우리 성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들을 해쳤으니, 그 죄악이야말로 하늘이 분개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중략) 왕의 나라(조선)는 줄곧 우리의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왕년에 왕의 나라가 왜적의 변란을 겪게 되자마자 본조에서 즉시 10만 군사를 파견하여 몇 년 동안 사력을 다해 왜적을 쓸어버렸는데, 이는 왕의 나라가 대대로 독실하게 충성을 바쳐 온 만큼 왕에게 계속 왕조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겠다고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아무리 나라에 일이 많다 하더라도 어찌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명이 제기한 명분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명이 원병을 보내어 조선을 도왔고 나라를 다시 세워주었으니 이에 보답하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고민에 빠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어서, 대규모 파병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광해군은 주변국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무조건 명의 파병 요청에 따를 경우 강력한 힘을 쌓아가고 있는 후금의 침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조선이 다시 전란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명의 요청에 조정 대신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는 자명하다. 오랜 기간 명에 사대의 예를 갖춰온 자들이 아닌가? 대신들은 광해군에 파병 준비를 재촉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원병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때론 조선이 대규모 군사를 파병하지 않고 조선 내에 군사를 대비시켜 두는 것이 후금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방책이라는 점을 들어 명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의 강력한 요청은 계속 이어졌고, 대신들도 명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란 당시 명나라가 군사를 보냈었다는 명분 때문에라도 광해군은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광해군은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파병 결단이 아니라 실리를 챙기는 전략이었다. 광해군은 장수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리해서 전선에 나서지 말고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라고 일렀다. 상황을 보아 무혈 항복을 염두에 두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명의 강요에 못 이겨 파병은 하지만 우리 군사들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619년 2월 강홍립은 1만 병사를 이끌고 요동지방에서 명군과 합세했다. 조선군의 위치는 후방에 있었고 섣부른 명군의 진격으로 명군의 선두는 여진군에 대패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상황을 보아 처신하라’는 것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사신을 보내 이번 파병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리고 후금에 적대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여 화의를 맺었다. 광해군의 이 정책에 따라 후금이 날로 강성해져 명을 멸망시키는 와중에도 조선은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불운했던 군주로 꼽히곤 해요. 반정으로 쫓겨난 임금이라는 이유뿐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으나, 여러 환경적 조건 때문에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죠. 국사 교과서에선 광해군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능란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조선을 전쟁의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한 현명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고,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성리학에 바탕한 윤리의 잣대로 보았을 때, 광해군은 은혜를 모르고 명을 배반한 임금, 동생을 죽이고 모후를 폐위시킨 패륜아였지요. 광해군에 대항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일파가 조선 후기 내내 권력을 쥐었으니 이런 평가는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해요. 광해군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역사는 패배자에게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니까요.
선조나 태종 등 조선의 군주는 보통 ‘조(祖)’나 ‘종(宗)’의 칭호를 갖게 되는데,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이 칭호를 받지 못한 조선의 두 군주 중 한 명이에요.연산군은 지금까지도 폭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지만, 광해군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재평가를 받으며 역사적 복권이 이루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