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전 후,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일본 각지의 광산과 공장에서 본국 귀환과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임금을 비롯한 강제저금, 가족송금, 후생연금, 보험금, 퇴직수당, 조위금 등 각종 수당과 저금을 포함한 미지급금을 요구했다. 골치 아파진, 당시 일본을 점령 중이던 연합군총사령부는 징용 노동자의 본국 귀환을 서두르는 한편, 배상 절차의 일환으로 미수금을 한 곳에 결집시키라고 일본 정부에 지시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공탁[1]을 결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꼼수가 등장했다. 명부에 이름과 본거지가 있는데도 통지서를 보내지 않고, 공탁 사실을 관보(官報)에 공시하지 않았으며, 공탁을 기피한 기업도 있고, 공탁금 액수도 허위가 많았다. 어찌 됐든 일본은 이 공탁 자료를 손에 쥐고 한일회담에 임했다. (한일회담은 1951년부터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을 타결할 때까지 14년 간 한국와 일본이 7차례에 걸쳐 있었던 일련의 외교 교섭을 말한다.)
한국은 한일회담 초기부터 미수금 문제를 제기했지만, 한국 측 근거는 방대한 일본 측 자료와는 비교가 안 됐다. 더 큰 문제는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과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 개별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하고, 대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미수금 문제를 대신 책임지겠다며 무상 자금과 차관을 요구한 것이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도 없고, 진상규명 과정에 대한 협의도 없이 이뤄진 한일협정을 두고 국내에서는 대대적으로 반대 시위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