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의 본명은 정삼(鄭森)이며,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던 해상왕 정지룡의 아들이다. 1624년 일본 큐슈의 히라도에서 아버지 정지룡과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 마츠(田川松)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성공이 태어나던 즈음 그의 아버지 정지룡은 나가사키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거대한 해상무역 조직을 장악한 상인(해적) 그룹의 우두머리였다.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27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고향인 복건성으로 돌아왔다. 복건성 하문(廈門)에 세력을 구축한 정지룡은 곧바로 정성공을 중국으로 데려왔는데, 일본인 어머니와 함께 큐슈의 근거지에 안전하게 머물던 아들을 복건성으로 데려 온 이유 중에 하나는 정통적인 유교 교육을 시키고, 나아가 그를 중국의 주류 관료 사회로 진입시키기 위해서였다. 정성공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으로 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정식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비교적 평탄했던 정성공의 일생은 1645년 청의 군대가 강남으로 진격해 오면서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의 군대가 복건성까지 내려왔을 때,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명나라의 운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청에 투항하였지만, 이 전란의 와중에 어머니 다가와는 청나라 군사들에게 유린을 당한 후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머니의 가슴 아픈 죽음도 당연히 정성공의 인생 행로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버지 정지룡의 놀라운 배신은 정성공의 남은 인생 행로를 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가 허망하게 무너진 뒤에,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와 일종의 망명 정권인 남명(南明) 정권을 수립한 명 황실의 후예들은 최후의 보루인 복건성을 수비할 정성공에게 황실의 명운을 걸 수밖에 없었다. 남명의 황제가 해적의 후예에 불과한 젊은 정성공에게 황실의 성[1]을 하사한 이 파격적인 처우는 역설적으로 남명 정권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정성공은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규합하여 청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1646년 청의 군대가 복건성에 밀려들었을 때,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의 계획적인 방해로 제대로 전투도 못 해보고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복건성은 함락되었고, 이후 정성공은 아버지와 연을 끊고 본격적인 반청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성공은 우선 만주족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해상의 요새들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수습하여 청의 군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청은 복건성 대부분의 지역을 함락했지만 하문섬 일대의 해상 요새를 장악한 정성공 군대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1653년 다급해진 청의 순치제(順治帝)는 정성공에게 청나라에 귀의하면 복건성 남부 천주 일대를 하사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성공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오히려 하문의 지명을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를 담아 사명주(思明州)로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