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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상하이, 중국과 서양의 이색적인 만남

상하이 하면 뭐가 떠올라? 자동차만큼 많은 엄청난 은행 수? 무진장 높다는 동방명주 탑? 황푸 강변을 따라 고풍스런 서양식 건물이 많이 모여 있는 와이탄(棍牽)은 어때? 이곳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혼란했던 역사와 이국의 문화가 한데 얽혀 있는 묘한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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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 항구 도시를 열다

상하이는 불평등 조약에 의해 반강제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는데,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유명한 아편 전쟁이야. 아편은 당 왕조 때는 ‘약초’로 알려졌는데, 명·청대를 거치며 ‘의약품’에서 ‘마약’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어. 아편은 이미 청나라 중기 18세기부터 중국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고 있었어.

강남 지역은 15세기부터 타이완 등 남쪽 중화권 국가들과 활발하게 경제 교류가 있었거든. 이 남쪽 지역을 통해 ‘양화洋貨’로 불리는 서양 문물이 들어왔고, 아편도 그중 하나였어. 18세기 이래로 이 양화는 광동, 푸젠, 저장의 상업 조합들이 독점했어. 양화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된 상인들은 북쪽의 톈진에도 양화 가게를 차렸고, 북쪽으로 갈수록 아편을 비롯한 양화의 물건은 더욱 비싸졌어. 이미 강남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이 만연해진 거지. 

강남 지역으로 유입된 아편은 내륙의 강을 통해 베이징 아래에 있는 항구 도시들로 흘러 들어갔고, 상하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어. 아편은 중독 문제도 심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은 유출’이었어. 중국인들이 서양 물건을 사는 데 은화를 썼기 때문이야.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아편은 1830년대 전 계층으로 퍼졌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됐어. 당시 황제였던 도광제는 아편 금지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아편을 팔던 영국 상인들에게서 아편을 빼앗아 바다에 갖다 버리게 했어. 하지만 영국은 이미 아편 탈취를 빌미로 중국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래서 아편 전쟁이 일어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