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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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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채와 에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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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기슭, 4·19묘지와 장미원 사이에 있는 수유리 주택가에서 살 때만 해도 에어컨은 언감생심이었다. 아니, 필요하지가 않았다. 선풍기를 틀어 놓았다가도 잠이 들 때에는 꺼야 했다. 한낮에는 (아주 좁은 골목 같았지만) 마당에 물 몇 바가지 뿌려 놓고 문을 열어 놓으면 견딜 만했다. 광고 글과 제품 사진이 반드시 있었지만, 아내가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서 얻어 온 플라스틱 부채도 제법 쓸 만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에어컨 시대로 접어든 데에는 서너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땅에 착 달라붙어 있던 낡은 단층집에서 15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으니 열대야가 무슨 열병처럼 번지던 시절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내가 뒤늦게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아내와 우리 ‘만득이’를 위해 벽결이형 에어컨을 턱 하니 들여놓았다. 한여름에 태어난 둘째 아이와 아내, 그리고 나와 딸내미는 에어컨 덕을 톡톡히 보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아는 상식이지만, 에어컨 스위치를 올리고 나면, 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 그 해 여름, 밤마다 문을 닫으며, 에어컨이 갖고 있는 ‘고약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어컨은 더위를 쫓는다는 기능적인 면에서는 부채와 혈연 관계이지만, ‘생태적 측면’에서는 부채와는 전혀 다른 종​種​이다. ‘에어컨에 대한 고찰’은 나를 어린 시절, 저 부채가 위세를 부리던 사십 년 전의 시골 마을로 데리고 간다.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참외, 수박이 저마다 마른 잎사귀들을 깔고 앉아 속으로 단단해지는 밭 한 귀퉁이, 원두막 한 채, 턱 하니 버티고 서있다. 사방이 훤하게 트여 있는 원두막에는, 막 낮잠에서 깨어난 할아버지가 밀려드는 더위를 견디다 못해, 왼손으로 저고리 앞섶을 들추고 부채질을 해 댄다. 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원두막이 보이는 한여름 오후, 느리고 순한 원경은 정물화처럼 정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