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 포니였다. 내가 열두어 살 무렵, 우리 집에 처음 들어온 강아지. 한나절 넘게 방바닥에 엎드려, 중학교에 다니는 형의 영어 사전을 뒤져 지은 이름이었다. 포니는 발바리 새끼였다. 발바리라는 개의 품종은 물론 없다. 발바리는 바둑이나 삽살이처럼 개의 크기나 모양을 규정하는 비공식 언어였다. 발바리는 황구(똥개)에 견주어 작고 귀여웠다. 제법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포니는 즉각 내 동생이 되었다.
돌아보면, 1970년대 초반, 서구화는 개의 세계에서도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전기가 열 살 때 들어온 시골에서 자랐거니와, 그 농촌에서도 셰퍼드와 포인터를 비롯해 불독, 도사, 스피츠 따위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열 살 무렵, 저 외국 개들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다른 ‘독서량’이 있었다. 향원의 만화들. 코가 동그란 주인공(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과 꼭지라는 꼬마 여자애가 나오는 향원의 만화에는 꼭 개(투견)가 나왔던 것이다. 삼십여 년 전, 저 외국 개들은 단순한 개가 아니었다. 저마다 출신국의 긍정적이고도 강력한 이미지를 전파하는 ‘매체’였다. 셰퍼드를 보라, 그 늠름한 체격은 새까만 시골 아이를 제압하고도 남았다. 잘 훈련된 셰퍼드(훈련받지 않은 셰퍼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곧 기계 같은 독일 병정이었다. 포인터는 또 어땠나.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그리하여 언제든 사냥감을 향해 튀어나갈 준비를 갖추고 있는 포인터는 서양 귀족들의 고급스런 여가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불독이나 스피츠 역시 서양의 전투력과 우아함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니 셰퍼드를 키우는 집은 똥개를 키우는 집과 전혀 다른 집이었다. 개는 신분증이었다. 셰퍼드 새끼 한 마리 구하지 못하는 내 아버지가 얼마나 초라해 보였던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세워 초가집을 부수고, 서낭당을 없애는 새마을 운동은 개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셰퍼드를 앞세워 똥개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똥개의 이름을 영어로 달아 주던 사태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도꾸, 해피, 메리, 쫑…. 누렁이, 삽살이, 바둑이 따위로 불리던 황구들이 하루 아침에 창씨 개명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영어식 이름을 따로 명함에 박는 풍속이나, 이메일 주소를 두어 개씩 지어 갖는 것도 누렁이가 도꾸로 바뀐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터. 인간이 개를 길들인 것 못지 않게, 우리는(특히 한국인은) 개의 품종(유행)을 바꾸어가며, 개의 이름을 붙이며 길들여진 것이다. 개가 서구화한 가정은 그대로 한국인의 서구화 과정과 일치한다. 개와 더불어, 개와 같이, 한국인은 미친듯이 서구화했다.
포니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 나는 의기양양했다. 누가 강아지 이름을 포니라고 지을 수 있으랴! 나는 근대화의 전위였다. 1970년대 후반,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국산 1호 승용차 이름이 포니였을 때, 나는 나의 예언자적 능력을 새삼 확인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죽어라고 영어와 세계사, 화학과 정치경제를 배우며, 나는 모범적으로 서구화하고 있었다. 강아지 포니에서 국산 자동차 포니(‘마이 카 시대’라는 유행어가 있었다)에 이르는 기간이, 멋도 모르고 치열했던 나의 서구화 과정이었다. 서구 문명에 길들여지는 과정이었다(박정희는 조련사였고, 어린 나는 강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