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계에서 디자이너의 외모는 그리 중요한 변수가 못 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디자이너라면 대체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외모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진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 로스 러브그로브는 좀 다르다. 훤칠한 키에 흰 수염이 수북한 모습과,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을 보면 디자이너라기보다는 미래에서 온 마법사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디자이너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비로운 포스이다.
수년 전 그를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의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팡이만 안 들었지 그는 21세기의 간달프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의 디자인들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의 디자인 작업을 보면 현실의 물건이지만 뭔가 현실적이지 않고, 미래적이면서도 중세적인 느낌이 나서 아주 몽롱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로스 러브그로브가 ‘이스탄불’이라는 욕실용품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한 샤워기는 신비스러운 포스를 한껏 느끼게 해준다. 뭔가 샤워기 같기는 한데 진짜로 샤워기처럼 생기진 않은 디자인이다. 꼭 외계인이 쓸 법한 샤워기 같다고나 할까. 버섯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양념통처럼 보이기도 하는 형태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 개가 아니라 몇 개의 샤워기가 모여서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는 점도 아주 특이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트에 속한 샤워기들이 전부 제각각으로 생겼다. 이 디자인이 그다지 질서정연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획일적인 외양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일상에서 접하는 흔한 디자인보다 곱절은 신비로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샤워기의 재질은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흔히 스텐이라고 불리는 이 재료는 표면이 깔끔하고 매우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습기가 많은 욕실을 디자인할 때 주로 쓰이는데, 번쩍거리는 표면과 단단한 재질로 인해 매우 차갑고 기계적인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그다지 편안하거나 친근하지는 않은 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