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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테크와 풀무꾼 ‘한스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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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미국의 유서 깊은 대형 로펌에 AI 변호사 로스(ROSS)가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이 적잖이 놀랐다. 로스는 판례 수천 건을 분석해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추려내는 일을 한다. 본래 초보 변호사가 하는 일로, 시간이 많이 드는 업무다.

2018년에는 우리나라 로펌에도 AI 변호사가 등장했다. 법률전문가용 AI 프로그램 유렉스(U-LEX)다. 유렉스는 일종의 검색 시스템인데 일상용어를 검색하면 법률 용어로 바꿔서 이해한 후 관련 법령과 판례를 알려준다. “보험료를 연체해 일방적으로 계약이 해지됐다면?”이라고 입력하면, 100건에 달하는 법령·판례를 화면에 띄운다. 관련 법령 검색에만 3~4일씩 걸리던 것이 단 몇 분으로 줄었다. 국내외 법률 시장에 인공지능 바람이 거세다. 일명 ‘리걸테크(Legal-Tech)’ 시대라고들 떠든다.

인공지능 의사가 등장했으니 인공지능 변호사의 등장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낯선 직업이 생겨나는 걸 구경하고 있다. 매해 ‘유망직업 베스트 10’ 같은 게 회자되는데, 요즘은 직업명만 들어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가늠조차 어렵다. 그리고 내심 우리는 지금 하는 일이 낡은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내가 하는 출판사업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는 알겠는데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 전집을 읽고 있는데, 그중 한 작품의 주인공 풀무꾼 한스 팔의 넋두리를 들으며 기시감이 들었다.

“사실 로테르담의 정직한 시민이라면 나의 일만한 직업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대대로 일거리가 부족하지도 않았으며, 돈이나 의욕에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신용 또한 최고였지요.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삽시간에 몰락의 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에 부채질을 해주어야 한다면 단지 신문지 한 장으로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