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선택으로 탄생한다. 다만 그 선택권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흔히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가족을 떠올려보자. 아마 대부분은 부부와 그들의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러한 형태의 가족은 ‘두 사람이 부부가 되겠다는 선택’과 ‘부부가 자녀를 갖겠다는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개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지 모른다는 점이 부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면 자녀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을 부모로 삼을지도 결정할 수 없다. 즉 혈연관계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선택으로 만들어지지만, 부모와 자식 모두 정확히 어떤 사람이 가족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이룬다는 모순을 지닌다.
<어느 가족>의 시바타 가족은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이라 일컬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쇼타는 엄마로 보이는 노부요, 아빠로 보이는 오사무, 할머니로 보이는 하츠에, 이모로 보이는 아키와 함께 산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여느 가족과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혈연관계가 아닌, 타인이나 남편의 가정폭력, 남편의 외도, 부모의 방임을 계기로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기로 선택한 가족이다. 사회에서 이들은 가짜 가족에 불과하다.
시바타 가족의 생계 수단 역시 범상치 않다. 노부요와 오사무가 각각 세탁 공장과 공사장에서 일해 돈을 벌지만,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가족을 온전히 부양할 수 없다. 그래서 시바타 가족은 할머니 하츠에의 연금과 오사무와 쇼타가 훔쳐 오는 생필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평소처럼 생필품을 훔친 오사무와 쇼타는 추운 날 집 밖에서 떨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유리를 발견한다. 오사무는 빼빼 마른 아이가 안쓰러워 저녁만 먹여 돌려보낼 요량으로 유리를 집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아이의 몸에 남아있는 학대 흔적과 ‘아이를 원치 않았다’며 싸우는 친부모를 본 시바타 가족은 차마 유리를 진짜 가족에게 돌려보내지 못한다. 유리 역시 자신을 보듬어주는 시바타 가족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시바타 가족과 유리는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