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대작 영화들을 몹시 좋아한다. 영화에 펼쳐지는 판타지 세계 속 숲과 눈 덮인 산, 장엄한 바다. 이런 곳이 설마 지구에 있을까? 컴퓨터 그래픽 아닐까? 하며 영화 크레딧을 지켜봤다. 크레딧이 끝나갈 무렵 나온 로케이션 장소는 뉴질랜드 북섬.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 북섬을 검색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사진을 뒤적이다 뉴질랜드 북섬 최북단 케이프 레잉가(Cape Reinga)의 거대한 바다를 발견했다. 감히 뛰어들 생각조차 들지 않는, 그저 사진으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압도되는 바다. 그 바다로 떠나보자.
케이프 레잉가는 뉴질랜드 북단의 큰 도시 황아레이에서 북쪽으로 250㎞ 더 가면 닿을 수 있다. 거리에 비해 길이 많이 거친 편이라 차로 4시간 30분가량 가야 한다. 운전이 부담된다면, 주변의 또 다른 소도시인 카이타이아에서 출발하는 가이드 버스 투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 만약 하늘에서 거대한 바다를 보고 싶다면 베이 오브 아일랜즈에서 경비행기를 타는 것도 가능하다. 그 편이 시간도 훨씬 짧게 걸린다. 케이프 레잉가 해변은 뉴질랜드에서 ‘90마일(144㎞)’ 해변이라 불리지만 실제 길이는 약 60마일(95㎞)이다.
이 해변에는 전설이 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죽으면 영혼이 이곳 케이프 레잉가로 모인다고 한다. 케이프 레잉가 절벽에 자라나는 포후투카와 나무에 영혼이 스며든다고. 포후투카와 나무는 평평한 대지부터 절벽 그리고 바닷가까지, 뉴질랜드 전역에서 자라는 나무다. 여름이면 빨간 꽃을 가득 피우고 높이는 25m까지도 자란다. 이 나무로 마오리족의 영혼이 뛰어내린다고도 한다. 그 후 나무뿌리를 통해 마오리족은 저승이자 영혼의 고향인 하와이키로 돌아가게 된다고 여긴다. 절벽에서 자라는 성스러운 포후투카와 나무는 수령이 800년쯤 된다. 케이프 레잉가에서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 땅에 살다 떠나간 마오리족을 그려보면 어떨까.
이렇듯 마오리족에게 신성한 땅인 케이프 레잉가는 2000년대 초반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관광객이 늘자 자연이 망가졌고, 신성한 땅에 함부로 발을 디디는 이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크게 항의했다. 그 결과 케이프 레잉가의 최북단인 노스케이프(Northcape)가 자연보호 및 과학연구 보호구역으로 지정, 관광객이 접근할 수 없게 됐다.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은 노스케이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