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루이 16세는 1793년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참수형 당한 국왕,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던 셈이야. 단두대(기요틴이라고도 한다)는 프랑스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기 위해 사용된 사형기구야. 프랑스 혁명기에 4만 명 이상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특히 귀족이 많았다고 해.
파리에 끌려온 게 1791년,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게 1793년. 이 두 해 남짓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우선 루이 16세의 거취를 두고 다양한 혁명세력 사이에 정치적 힘겨루기가 벌어졌어. 국민의회는 루이 16세가 끌려오자 난감한 상황에 빠졌어. 국민의회가 준비 중인 헌법은 ‘입헌군주제’에 기반하고 있었거든. 입헌군주제란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권력은 헌법 아래 두는 정치체제야. 그러니 어쨌든 국왕이 있어야 하잖아. 국민의회는 처음에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다가 7월 15일경 루이 16세를 복위시켰어(그러나 여전히 혁명군에 의해 감금당한 처지였지). 7월 17일, 반발한 급진파들이 주축이 돼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어. 이 시위는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온건주의자들 대신 점점 공화파들이 세력을 확장하게 돼. 당시 프랑스에는 오늘날의 정당과 거의 흡사한, 다양한 정치 클럽들이 있었어. 자코뱅파도 그중 하나인데, 자코뱅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자주 모임을 갖던 수도원의 이름에서 유래했어.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자코뱅의 세 거두’로 불려. 자코뱅파 안에도 파벌이 있었어. 입헌군주제파이던 푀양파, 절충 공화파인 지롱드파, 급진 공화파인 산악파가 그들이야. 그러나 혁명기를 거치면서 다른 파의 인물들은 차례차례 떠나고, 1792년 무렵에는 급진 공화파 집단이 남아 주도권을 쥐게 돼. 변호사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주요 인물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