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1,496달러로, G7[1]의 일원인 이탈리아(3만 1,288달러)보다 많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수출은 계속해서 호조였다. 특히 ICT 3대 주력 품목인 반디폰(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은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 우리나라는 ICT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는 남모르게 고생한 개척자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ICT가 태동한 것은 1982년 봄이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근무를 그만두고 귀국한 전길남 박사는 한국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서울대 연구실 PC에서 입력된 ‘SNU’라는 문자가 250㎞ 떨어진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PC 모니터에 떴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인터넷 구축 국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군사기밀을 목적으로 감춰왔던 인터넷 기술이 한국에 의해 독자 개발되고 공개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삼성에서는 이건희 고(故) 회장에 의해 반도체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서막이었고,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나 다름없었다. ICT 분야의 개척자들은 수많은 편견과 장벽부터 뚫어야만 했다. 인터넷을 탄생시킨 전길남 박사도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 처음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정부는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비판만 더했다. 그는 더 이상 정부에서 일할 수 없게 되자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인터넷 개발에 성공하며 후학을 키워냈다. 덕분에 전 교수의 카이스트 연구실에선 김정주(넥슨), 송재경(리니지), 나성균(네오위즈) 등 미래 IT의 거목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