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스탁은 1990년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디자이너였다. 우아한 고전주의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그의 디자인은 세계를 매료시켰고, 곱슬머리에 뚱뚱한 몸매를 가진 그는 거의 락스타에 육박하는 인기를 누렸다. 지금까지 그만큼 핫한 인기를 누렸던 디자이너는 없을 정도다.
필립 스탁이 과거 락스타와 다름없는 디자이너로 거듭났던 비결이 뭘까? 그가 디자인한 파리채 ‘닥터 스쿠드’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파리채에 ‘닥터’라는 이름을 붙인 것부터가 재미있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얇고 작은 몸체임에도 그 존재감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작은 발 세 개로 바닥에 스스로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파리채가 아니라 무슨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몸체로 되어있는 것도 특이하고, 파리채답지 않게 우아한 곡면을 뽐내는 겉면 역시 오렌지색 크림을 발라놓은 듯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가장 백미인 건 파리를 잡는 채 부분이다. 놀랄 만치 유머러스하게 제작되었다. 파리를 타격하는 넓은 부분에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얼굴 모양을 그려 놓은 게 아니라 숭숭 뚫린 구멍의 크기 차이가 모여서 사람 얼굴 형상을 이룬 것이다. 인쇄의 원리와 착시 원리를 적용한 디자인이다. 필립 스탁의 차원 높은 관찰력은 물론이고, 착시 원리를 창조적으로 구현해낸 통찰력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 뛰어남을 파악하면 이 디자인을 단지 웃으면서 대하기는 힘들다.
사람 얼굴 모양을 하필이면 파리를 잡는 채 부분에 겹쳐놓아 문학적 은유를 시도한 점도 찬탄할 만하다. 파리와 사람 얼굴이 패러독스(Paradox)하게 겹쳐서 매우 난감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 정도면 플라스틱으로 쓰인 문학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