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 《개》의 주인공은 ‘보리’라는 이름의 진돗개야. 소설에서 보리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 내용이 맹랑해.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 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나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 보니 돼지고, 태어나 보니 사람이고, 태어나 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맞는 말이야. 자신의 탄생을 ‘어쩔 수 있었던’ 생명체는 없어. 어떤 부모님이 세계적인 축구선수 아들을 낳고 싶었을 수 있고, 또 신(神) 같은 존재가 어떤 목적을 위해 인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라고 해도 태어나는 당사자의 의지가 반영된 건 아니야. 보리의 자기소개는, 모든 인간이 ‘정신 차려 보니 태어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일깨워 줘.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었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상황을 “세상에 던져진 것”이라고 표현했어. 이 깨달음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이야.
실존이란 ‘실존 인물’이라고 쓸 때처럼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철학에서는 다른 뜻으로 쓰였어. 실존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해. 원래 ‘본질’은 ‘어떤 존재의 일반적 본성’을 뜻해. ‘애완견의 본질’이라고 하면, 여러 애완견의 공통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어. 애완견 각각의 개성을 언급하긴 어렵지. 이에 반해 여러 애완견이 모두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쓰인 철학 용어가 ‘실존’이야. 그러다가 현대로 오면서 인간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는 용어로 뜻이 바뀌었어. 그 참뜻은 사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에 잘 담겨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