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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안개 속에서 마주한 삶의 진실

고향에 도착한 남자는 더 이상 옛날의 비루한 모습이 아니야. 도시에서 크게 성공을 했으니까. 하지만 자랑스럽기보다 부끄러워졌어. 왜일까?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그저 도망치면서 만들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고향 무진에서 그는 우연히 자신과 아주 비슷한 여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어. 하지만 삶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 세속적인 욕망을 뿌리치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거리낌 없이 달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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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유일한 특산물이라는 무진. 그곳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탄 한 사내. 오랜만에 찾는 고향이지만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아. 온통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뿌연 무진의 풍경처럼, 그의 여정은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게 흘러가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은 그 남자의 짧은 여행을 따라가면서 그가 보고 느끼고 만나는 사물과 풍경과 인물 군상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어. 그렇게 완성된 이 여행의 기록에는 60년대라는 시대상과, 그 위를 불안하게 표류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촘촘히 박혀서, 결국 가장 뚜렷한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말지. 그것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소설 《무진기행》은 시골에서 상경한 한 남자가 서울에서 크게 성공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귀향’의 모티브로 이야기는 진행돼. 그렇지만 귀향을 다룬 대개의 소설처럼, 고향에 돌아가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채우고 변화하는 주인공은 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아. 《무진기행》에서의 고향 무진은 분명히 주인공에게 변화의 가능성과 어떤 깨달음을 주지만, 현실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주인공은 그 속삭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고향이 제대로 고향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시대. 그래서 고향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남자는, 결국 변화할 수 없는 자신만을 마주한 채 쓸쓸하게 서울로 올라오게 돼. 《무진기행》은 주인공이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깨닫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는 과정을 건조하면서도 매우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안개의 고장 무진

버스에 탄 ‘나’, 윤희중은 4년 만에 무진으로 향하고 있어. 버스 안의 다른 승객들은 한창 무진에 관한 이야기를 떠드는 중이야. 무진에는 딱히 명산물이 없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말이야. 정말 그래.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정말 무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곳이야. 바다가 가까이 있으나 수심이 얕은 바다만 몇백 리라 딱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없고, 또 이렇다 할 평야도 없으니 농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장소. 유일하게 단 하나의 특색이 있다면 안개가 지독하게 낀다는 것. 바다 내음이 섞인 축축한 6월의 바람이 점점 더 세게 피부에 닿을수록 윤희중은 무진에 가까워졌음을 느끼지.

윤희중은 무진에서 무기력하게 살다가 서울에서 크게 성공한 남자야. 유명한 제약회사 사장의 딸과 결혼해, 곧 그 회사의 전무가 될 예정이거든. 그는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무진에 내려가 쉬라는 아내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모든 권력은 아내와 장인에게 있고, 그는 그들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