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이전, 경제의 중심은 토지에 있었다. 농경 중심의 사회였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려시대 토지제도는 조선 혹은 그 이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을까?
고려의 토지제도 ‘전시과’는 좁은 의미로는, 고려 왕조가 신분이나 관직, 직역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라는 의미다. 넓은 의미로는 이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토지 지배관계 전체를 뜻한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이때의 토지 지급은 토지의 소유권 전체를 주는 것이 아니고, 토지세를 걷을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한다는 사실이다.
통일신라 말기,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들로부터 이중삼중으로 수탈을 당했다.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중앙 국가의 통제는 지역에 닿지 않았고, 지방 호족들은 각지에서 땅을 차지하고 권력을 차지했다. 호족 세력이 기세등등하던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사람은 개경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 왕건이었다. 후고구려에서 왕으로 옹립된 왕건은 나중에 국명을 고려로 바꿔 새 왕조를 일으켰지만,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왕건은 개국 초기에 어떻게 해서든 개국 공신이면서 동시에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인 호족들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했다. 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둔 이유도 이들 지방 호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한편 태조 왕건은, 민생 안정을 위해 백성으로부터 토지를 수취할 때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농민들의 사유지 민전(民田)은, 소유권은 인정하되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해 공전(公典)으로 편입, 국가에서 10분의 1의 토지세를 거두어들였다. 토지세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공전과 사전[1](私田)으로 나뉘었다. 국가 조세용 토지인 공전은 고려 말 기준으로 전체 토지의 약 40% 정도였다. 나머지 60%인 사전은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청에 있었다.
고려 개국과 함께 태조는 호족의 공헌도를 따져 수조권을 분배했다. 수조권은 토지를 지급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소출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는 권리다. ‘나라를 세우는 데 얼마만큼 역할을 했는지에 따라 토지를 나눠준다’고 하여 역분전役分田이라고 부른다. 대상은 개국공신에 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