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여전히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교적 가치로 숭상되는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사람들은 유교를 창시한 공자를 낡은 가치의 원흉인 양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의 유교는 공자의 사상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아는 유교는, 중국 송대 주희가 공자의 유교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성리학(주자학)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현대로 전해져온 것들이다.
공자의 유교 사상이 처음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를 통해서였는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유교 경전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이 설립됐고 곧이어 백제와 신라도 유교를 수용했다. 당시 삼국은 유교 사상을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이자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도덕 규범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유교 사상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렇다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아니었다. 당시 유교는 불교와 도교 및 토속 신앙과 공존했다.
그러다 고려 말(1290)년 중국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전파되면서부터 상황이 돌변했다. 성리학은 유교만을 진실한 사상으로 보았고,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을 주장한다며 이단으로 배척했다.
성리학은 조선 성립 이후 더 굳건한 지위에 올랐다. 조선 건국에 일조한 정도전 등 유림[1]은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의 멸망, 새로운 국가인 조선의 성립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희의 성리학을 활용했다. 유림이 세운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은 유림의 권력을 보호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국가의 권력층인 유림은 성리학에 계급적인 이해를 투영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공자의 말은 모두 각자 직분에 맞는 일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를 사람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위치의 신분을 타고나며, 이 신분의 틀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왜곡했다. 이를 토대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신분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질서라는 이름으로 장자 상속·적서차별·가부장제의 심화 등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 공자가 유교 사상에서 명시한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또한 조선의 유림은 16세기 후반부터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사조를 형성했고, 조선의 성리학은 사단칠정[2](四端七情)의 문제를 해명하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철학적 성리학 연구는 200∼300년여에 걸쳐 풍부하게 진행되며 중국이나 일본과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게 발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참여적인 공자의 유교 사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림_김홍도, <소과응시도>)
조선 후기 이후, 성리학 일변도의 한국 유교 사상은 꾸준히 비판을 받아왔다. 조선 말 등장한 실학(實學) 사상은 공자가 춘추시대의 혼란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유교를 내세웠듯, 유교가 본래의 실제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학자들은 기존 성리학에서 소홀히 하였던 생산 기반의 확대 등 삶의 구체적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20세기 초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가 닥쳐오자 ‘유교개혁론’이 힘을 얻기도 했다. 신채호 등은 부패한 유림을 옹호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개혁 의지가 결핍된, 유교 전통의 폐단을 지적했다. 현대에 와서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류의 유교 문화 비판이 성행했다. 한국인의 문화적 폐쇄성과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가 공자의 유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책망했다.
조선을 거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성리학은 2,500여 년 전 공자가 논한 유교와는 달라진 점이 많다. 공자는 조선의 성리학이 제시했던 사농공상이란 신분 질서를 주창하지도, 상명하복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으리으리한 제사상을 차리라며 허례허식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 인을 추구하면 충분하다 하였다. 우리 안의 유교적 가치관이란 무엇인지, 이제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도 중요하고, 공자의 유교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