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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유생의 대결》

성상 파괴에서 엑소시즘까지,
‘유교화’의 역동적인 궤적을 따라가다

한국 사회에서 유교에 대한 평가는 널을 뛴다.
망국의 원인으로 지탄받는가 하면 경제발전의 엔진으로 추앙받기도 하고,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한국의 ‘유교화’를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실천과 의례의 측면에서 다룬 이 책은
유교라는 특수한 종교가 인간의 보편적인 열망을 풀어간 역동적인 과정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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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판타지’가 어색한 이유

‘한국형 판타지’라는 장르가 있다. 영국에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있듯, 한국의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신비롭고 매혹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겠다는 것. 하지만 ‘한국형 판타지’를 내건 창작물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형 판타지’ 속 ‘전통문화’가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한국형 판타지’는 불교나 아득히 먼 옛날의 신화와 전설을 모티브 삼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둘의 영향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불교 사찰은 산속에 꼭꼭 숨어있는 데다, 신도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한국인은 불교적 관습과 문화에 익숙지 않다. 신화와 전설 역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양이 극히 적다.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서양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1885년 한양을 찾은 성공회 선교사 J. R. 울프는 도시 어디에서도 우상이나 사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한국의 종교에 대해 자못 모순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울프는 한국에 종교랄 것이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한국인들이 미신적이고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평가했다. 화려한 사원과 웅장한 조각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뒤로는 온갖 미신과 술수에 의지하는 사람들. 울프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이었다. 역시 한국은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보다는 《사바하》 같은 오컬트가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일까?  

종교학자 한승훈의 《무당과 유생의 대결》은 현대 한국의 종교적 경관이 지극히 밋밋하고 담백해진 원인을 조선시대 내내 추진된 ‘유교화’에서 찾는다. 중세 1,000년을 지배했고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절정을 찍은 유럽의 ‘기독교화’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역시 500년 내내 미신과 이교를 뿌리 뽑고 전 사회에 유교적 가치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지배층이 그토록 중히 여긴 유교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오지만, 한승훈은 독특하게도 유교화를 사상이나 관념이 아닌 실천과 의례의 측면에서 다룬다. 그의 관심사는 유교의 체계와 논리보다는, 그것이 사람들의 삶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꿨는가에 있다.(이미지 출처_한국문화재단)

신유가, 종교개혁에 착수하다

중국을 당나라618~907년가 지배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종교란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개념이었다. 흔히 3대 종교로 일컬어지는 유교와 불교, 도교의 경계는 느슨했고 선비면서 불자가, 승려면서 유자가 될 수도 있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송나라960~1279년 시대 ‘신유교[1](Neo Confucianism)’가 등장하면서다. 주돈이와 정재, 정호·정이 형제와 주희 등 신유교의 신봉자들은 우주의 원리부터 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에 대한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마련했다. 당시 불교와 도교에 밀려 과거 시험을 위한 낡은 학문으로 전락해가던 유교는 이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하는 보다 진지한 신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개인과 우주를 아우르는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만큼 신유교에게 불교와 도교가 느슨한 연대의 대상이 아닌, 엄격한 구분과 배척의 대상으로 바뀐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천과 의례의 측면에서도 신유교의 등장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신유교의 신봉자들은 그때까지 일상을 지배하던 여러 이미지와 상징을 없애거나, 간소화할 것을 주장했다. 신유교는 우주가 보편적 자연법칙인 ‘리理’와 뭉치고 흩어지며 만물을 이루는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신유교의 우주론에 따르면 인간의 형상을 한 초자연적 존재는 없다. 죽음 역시 단지 기의 흩어짐일 뿐이므로 생전의 모습은 유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유교 신봉자의 입장에서 신이나 망자를 본뜬 그림이나 상은 본질을 흐리는 눈속임일 뿐이다.

조선은 이러한 신유교의 이상이 가장 잘 구현된 나라였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신유교라는 설계도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대담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엔 온갖 신들과 자연물을 모시는 사당이 즐비했으며, 도시 한복판에는 불교 사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신유교 신봉자들이 ‘음사淫祀’라 부르던, 잘못된 존재를 섬기는 제사도 성행했다. 신유교 신봉자들에게 이는 모두 바로잡거나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오직 성경과 믿음만을 강조하며 성상과 성화를 없애버린 유럽의 종교개혁가들처럼, 조선의 신유가들 역시 형상을 갖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성상 파괴’에 나섰다.

청산해야 할 ‘적폐’는 비단 불교와 도교, 토착신앙만이 아니었다. 신유가들은 유교의 ‘잘못된’ 의례와 풍습까지 개혁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본뜬 공자상이다.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이전 왕조인 고려의 수도였던 평양과 개성의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는 공자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1574년, 두 도시의 공자상은 갑작스레 철거되어 땅에 묻힌다. 이 사건을 전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단 하나뿐이지만, 야사에는 개성 유생들이 공자상 철거에 강력히 반발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공자는 오늘날처럼 유교의 가장 큰 스승 정도가 아닌, 마치 신과 같은 숭배와 믿음의 대상이었다.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반도 곡부 대성전大成殿에 모셔진, 면류관을 쓰고 용포를 입은 화려한 제왕의 모습을 한 공자상은 이러한 ‘공자 신앙’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만물을 규율하는 건 추상적인 보편원리인 ‘리’뿐이라 여기던 신유가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공자를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공자를 신처럼 모시던 사람들은 지금껏 잘 섬겨온 공자상이 신성함이라곤 느낄 수 없는 신주로 교체되는 꼴을 견디지 못했다. 평양과 개성의 공자상 철거를 둘러싼 1574년의 해프닝은, 신구 유교의 충돌을 보여준 사건인 셈이다.

무당과 유생, 신과 망자를 둘러싸고 대결하다

비록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조선의 종교개혁은 꾸준하고 착실하게 진행됐다.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의 그림자는 점차 사라져갔다. 마지막까지 무속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의례인 기우제 역시 유교의 독자적인 매뉴얼이 완비됨에 따라 1745년에 이르러 무당의 참여가 금지됐다. 그렇게 조선은 완벽한 유교국가가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유교는 결코 조선을 완전히 물들이지 못했다. 유교의 영향력은 공간적으로는 한양 도성 내, 의례적으로는 국왕과 관료가 주도하는 ‘공식종교’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그 바깥, 다시 말해 도성을 벗어나 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민속종교’의 무대에선 여전히 불교와 무속이 성행했다. 다양한 술수를 부리는 술사들은 일종의 민간 의례 전문가로서 유교로는 풀 수 없었던 다양한 고충을 해결해주었다. 특히 죽은 자의 혼과 지역의 토착 신을 다루는 일에는 무당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무당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조선 유자들의 골칫거리였다.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무당에게 이단 혐의를 적용해 화형대에 올릴 수는 없었다. 신유가가 이상적인 전범으로 삼는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도 무당은 관직을 받고 국가의 공식 의례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왕실과 고위층의 무속 사랑도 문제였다. 법적으론 무당의 도성 출입조차 금지되어 있었지만 궁중의 여성들은 꾸준히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하고 기도를 드렸다. 무엇보다 기층 민중이 갖고 있던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열망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무속을 억압한다면 무당은 국가가 찾을 수 없는 음지로 들어가 더욱 활개를 칠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유자들은 민간종교의 무대에 올라 무당과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무당이 지배하던 주술적 세계관을 완전히 깨부수기보다는, 자신이야말로 주술을 가장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의 수많은 전래동화에서 귀신과 요괴를 무찌르는 주인공이 ‘지나가던 선비’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혹은 《장화홍련전》처럼 고을에 부임한 원님이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한을 해결해주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유생은 일종의 엑소시스트이자 마법사로서, 무당과 신과 망자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유교화’

유교는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누군가는 유교를 조선왕조 멸망의 원인으로 매도하지만, 누군가는 유교야말로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엔진이라 상찬한다. 아직까지도 유교의 유산이 대한민국 곳곳에 남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근대 이후 유교적 전통은 끊어진 지 오래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유교에 대한 평가가 널을 뛰는 가운데, 《무당과 유생의 대결》은 한국의 유교화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한국의 종교 경관을 화려한 성당과 성화가 가득한 남유럽보다는 칙칙하고 밋밋한 북유럽에 가깝게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유교는 한국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발휘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민간종교의 영역을 지배하던 무속을 끝까지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교의 힘이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은이 한승훈의 관심사는 유교가 얼마나 전지전능했는지, 혹은 무력했는지에 있지 않다. 그가 주목하는 건 무속과의 투쟁에서 유교가 보여준 역동성이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은 종교를 통해 세계와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초자연적 존재와 소통하고자 하며, 현세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한다. 다만 인간이 종교에 가진 다양한 욕망을 풀어내는 방식은 종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 점에서 한국의 유교화란 인간의 ‘보편적인’ 열망에 유교라는 ‘특수한’ 종교가 ‘다양하게’ 응답한, 성상 파괴와 엑소시즘이 모두 가능했던 역동적인 과정이었다.

한승훈: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이 책 외에도《왕의 수명을 줄여라》(공저), 《혁명을 기도하라》기도하라』 등이 있다.